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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천 문징명의 비파행(琵琶行)<Cinquante-cinq>

guem56 2011. 5. 23. 12:10

양자강

만리장강이 설산을 흘러내려 충칭을 지나고 상해로

들어가기전 숱한 호수와 지류가 있다

 

고을마다 강의 이름이 따로 있고

구강(九江 JiuJiang)

 

아래로 내려오면 여산이 있고 동남으로 가면 도자기가 나오는 경덕진이 있다

그 아래 동남엔 포양호가 넓은 바다처럼 있고

그 아래 서남엔 난창(南昌)이 있다

 

백낙천 당나라 시인이다

신라 사람들이 그 시문을 얻어가면 밤을 새워 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백낙천(772~846)은 두보와 이백이 세상을 하직하자

곧 태어났고

한유 유종원과 비슷한 시기를 살다간 사람이다

 

그가 815년 원화 10년에 구강에서 사마 벼슬을 했다

 

손님을 전송하러 뱃길에 나와 전별연을 하던 중 어디선가 비파 소리를 들었고

격조 있는 그 소리를 찾아 비파를 타는 여인을 만났고

다시 청해서 비파소리가 재차 구강의 밤하늘을 탔다

 

백낙천이 이에 감동해서 7언 88수 616글자의 비파행을 남기니 이 글이 천고에 전하는 바다

 

대주소주락옥반(大珠小珠落玉盤 큰 구슬 작은 구슬이 옥쟁반에 구른다)

백낙천은 여인의 비파소리를 이렇게 비유했다

 

음악이란 그 음악을 들을 만한 사람이 들어야 하고 그 감동이 시문을 남긴다

 

막사갱좌탄일곡 위군번각비파행(莫辭更坐彈一曲 爲君翻作琵琶行)

백낙천이 비파를 탄 여인에게 말했다

다시 한곡 연주함을 사양하지 마시오

내가 그대를 위해 비파행을 지으리다......

 

천년 지난 세월 그 여인의 이름자 남지 못함이 한인데...풍습이 그러하여 여인은 이름이 없는지...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 들어서고

몽골엔 테무친이 나고 그 손자 쿠빌라이가 남송을 멸했다

남송엔 충신이 있었다

 

문천상

쿠빌라이의 회유를 거절하고

처형을 당했으며 그 이름은 청사에 남았다

 

다시 명나라가 서고

문징명이란 선비가 세상에 나왔다

그는 문천상의 후예였다

평생을 학문과 서화에 정진했다

 

쑤저우 물의 도시 거기 졸정원이란 정원이 있다

비단장사를 실제 했다는 왕헌신이 꾸민 정원이나

이 정원에는 문징명의 예술안목이 스몄다는게 정설이다

 

문징명(1470~1559)은 오래 살았다

1557년 가정 36년 문징명이 죽기 두 해전

88세의 문징명이 글씨를 남긴다

 

행초로 쓴 그의 글씨의 글은 바로 백낙천의 비파행이다

더러 몇 구가 원문에 비해 빠져 있고

원문과 뜻은 같으나 글자가 다른 곳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흠이랴.....

 

구강의 밤

선창에 정박한 어느 배에서 흘러나온 비파소리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장시를 낳았고

그 시는 다시 700년 넘는 세월이 흘러

묵향에 배여 오늘날 남았다

 

나는 매화산자락 아래

어느 해 봄날 어느 새벽에 촛불을 켜고 앉아

작은 술 잔 세잔을 비우고

문징명 선생의 비파행을 읽었다

그리고 그 글씨를 흉내내어 보고 그 종이를 버렸다

 

세월은 가도 시문은 남으며 삶의 덧없음은

사람의 비감함을 자아낸다

 

오늘은 노무현 대통령이 가신 날이라 감회는 한층 더 비감하다

 

매화산인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