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을 지나 속초가는 길
가다보면 철정검문소가 있다
지금은 사라진 듯 하다
눈동자의 방향을 굴리지 않는 흰장갑의 헌병이 버스위로 올라와서
안녕히 가십시오 거수 경례를 하고 내리던 검문소
그 검문소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리를 건너면
내촌면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구절양장
아홉살이 고개를 넘어가면 인제군
상남이 나오고 하남을 거쳐 기린면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되어 길이 편하지만 신작로로 갈때는 진흙길이라 힘들었고
그 옛날을 생각해보면 우거진 산림에 사람이 살았을까 싶은 깊은 산골이다
상남에서 개인산으로 들어가는 미산골은 아스팔트 도로가 나기전에 보았다면 선경(仙境)이었다
어제 우연히 방송을 보니 드라마 백동수를 시작했다
백동수
그는 박연암보다 나이 어린 벗이다
출중한 무예로 이름 높았으며 현전하는 무예도보통지를 그가 정조의 명을 받아 편찬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연암집에는 백동수가 살기 어려워 서울 생활을 접고
조농사를 지어먹으러 강원도 인제 기린협으로 간다하여
말릴 수 없는 처지에 잘가라는 전별의 글(증백영숙입기린협서 贈白永叔入麒麟峽序)이 실려있다
이 글은 또한 김택영이 나라 망하고 중국에 망명하여 1914년 양계초의 서문을 받아 중국에서 간행한 여한십가문초에도 실려있다
박종환 감독이 한국 청소년 축구를 세계 4강에 올려놓던 시절
흑백텔레비젼앞에 숱한 사람들이 모였을 때 아직 기린가는 아홉살이 고개는 아스팔트가 아니었다
나는 거기 상남에서 2년을 채 못 살았다
여름날 초저녁부터 개구리가 하염없이 울면
미산 가는길
갯가에 앉아 모래밭에 불을 밝히고 한참을 앉아있다 밤이 깊으면 잠자러 오곤 했다
그 무렵 나는 여한십가문초에서 연암의 저 백동수(영숙은 그의 자)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런데 거기 상남인근 산마을에 백씨성을 가진 집이 한집인가 두집 있었고 그 집 아들이 상남중학교에 다님을 알았다
그 애에게 언제부터 여기 사는가? 물어보니 할아버지 할아버지 위라 했다
나는 백동수선생의 자손이 틀림없다고 나혼자 생각했었다
무예도보통지엔 정조 임금의 어필서문이 있다
마지막 구절에 이 책을 간행하는 뜻은....무예를 잘 익혀 날랜 무사되고 나라를 생각하란 뜻인데
그 책의 간행년도가 경술년이며 정조임금 14(1790)년이다
조선은 그후 두번의 경술을 거쳐 1910년 120년 만에 일본의 침략에 망했다
하여 내 마음은 한없이 슬프다
백동수는 문무를 겸전한 훌륭한 인재이다
그가 생계를 찾아 저 인제 기린협으로 들어가서 다시 또 나왔는지 나는 모르겠다
연암또한 궁벽한 황해도 금천 연암으로 화전 일궈 먹고 살러가서 연암이라 호를 지은거 같다
예나 지금이나 선비가 가난함은 비스름하다
날은 덥고 해는 긴데 하릴 없으니 앉아서 조는게 어떠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