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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도와 낙신부 송나라 휘종과 고종<Cent trente-quatre 134>

guem56 2011. 8. 30. 17:25

적벽강에 배를 띄우고 마음껏 마시고 놀았다는

소동파의 적벽부는 임술지추칠월기망으로 시작한다

임술년은 1082년이다

 

82년에 서화에 푹 빠져 높은 감식안을 지녔으면서

손수 명작을 많이 남긴 송나라 휘종이 태어난다

 

황허근처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대도시

카이펑 궁궐에 학이 날아든 것은 1112년이다

 

도교를 믿었다는 휘종은

학이 날아든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생동감있는 서학도(瑞鶴圖)를 남긴다

 

칼을 좋아하는 사람은 칼로 망하고

붓을 좋아하는 사람은 칼에 소홀하여 역시 칼로 망하는 수가 있다

 

여러 마리 학이 살아있는듯 대궐의 지붕위에 날아드는

상서로운 그림을 그린지 15년 만에 휘종은

여진족에게 잡혀서 정처없는 유랑을 떠나 낯선 만주땅으로 끌려가고 거기서 죽는다

 

그리고 서학도는 종적이 없다가 마지막 황제 푸이에 의해 만주로 가고

오늘날 만주 센양박물관에 그 원작자가 죽은 한 많은 땅 근처에서 찬연하게 빛을 내고 있다

 

휘종이 그 아들 흠종과 함께 끌려가고 카이펑은 전란으로 함몰되자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 조구(송고종)는 항저우 근처 임안에 가서 남송을 연다

 

금나라 사엔 강왕이라고 나오는 조구는

금군의 맹장인 종필의 군대에 추적을 당해 여러번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한편으로 강화를 하고 한편으론 추적자를 따돌리고 물리쳐서 80수를 누리지만

그 젊은 날 굴욕스럽고 위험한 고비는 평생 마음의 짐이 되었다

 

남송의 명장 한세충이나 악비 그리고 우국시인이며 무골인 육유의 관점에서 보면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임금이었으나

무엇보다 고종은 살아있음을 중시했고 겁이 많았던지도 모른다

 

핏줄은 내래오는지

조구 또한 대단한 솜씨를 가진 서예가였다

그가 남긴 낙신부 글씨는 낙신부 내용만큼이나 야들야들하고 아담하다

 

당나라 장군 유공권의 현비탑의 글씨와는 맛이 천리의 차가 있다

 

내가 지난날 유공권의 현비탑비를 그 내용도 모르고 따라 쓰면서

(왜 이리 글씨가 안진경이나 구양순 글씨와는 다르게 비뚤은가?)

여러가지 불평이 있었다

 

그건 태권도 두세달 배운 어린이가 돌담을 걷어차면서 아파하는 불만이었다

 

어느날 보니 유공권의 글씨가 미불에게 배어나오고

또 미불은 휘종임금에게 서화를 감식하는 벼슬을 받았다는 내용을 알았다

 

인간사 얽히듯이 글씨는 먹물이어서 색은검은색 뿐이나 그 사연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