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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양전투 10과 11<Cent soixante-dix-sept 177>

guem56 2011. 11. 28. 15:34

사마천이 사기를 쓰고 나서 쓴 글인지...

<보임소경 報任少卿書>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사마천이 친구 이릉장군의 흉노투항건에 대해 친구를 변호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형벌에 처해지고

그 비참함을 감수하고 역사서인 사기를 펴낸 전후사정을 보여준다

 

편지 수신자인 임소경이란 사람은

사마천의 도움을 청한 듯 하나

사마천은 명예로이 죽음에 임하란 취지로 이글을 쓴 듯 해서

읽기엔 무거운 글이다

 

이 글의 내용과 전후 사정을 알아볼 수 있는 또 다른 글이

 

이릉이 몽골에 억류된 채 중국으로 돌아간 소무에게 보낸 글

<이릉답소무서>란 편지글이다

 

후세인의 위작이라고도 하지만

이 편지글에는 어떤 곡절로

이릉이 포로가 되었는지

그리고 몽골초원에서 살아가는 이릉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글을 읽다보면

이릉의 5천 선봉대가

후원군이 끊겨 졸지에

결사대로 변하고

퇴로도 막히자

 

하나하나 죽어가면서

마침내 수백명으로 줄어들고

식량과 화살이 떨어져 어쩔수 없이 항복하게 되는 정황이 비장하게 그려진다

 

형양은 중국 호남성의 제 2도시로서

옛부터 물산과 교통의 중심지라서

삼국시대 유비 손권때에도 군사의 요충이었다

 

1944년 태평양 전역에서 미군에 밀리던 일본은

중국내에서 최후의 총공세를 취하고

 

중국군을 충칭 쪽으로 압박한다

 

우한이 점령되고 44년 6월에 일본군은 형양으로 들어온다

당시 중국 장개석 국민당 10군의 책임자는

방선각(方先覺 Fang XianJue)장군이고

 

중국 10군은 1만 8천명의 방어부대였다

일본 침입군은 일본 관동군 11군 병력수 10만에 무기가 중국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처절한 수성전이 벌어져서

일본군 2만 9천이 죽고 중국 10군도 만여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44년 8월 8일 50여일을 버티던 중국군은

실탄과 모든 보급품이 떨어지고

방 장군은 충칭에 이런 상황을 연락하고

자결을 택하나 참모들이 말려서

 

남은 중국군의 살상금지

부상병의 치료조건을 내걸고 투항한다

 

일본군 사령관은 요코야마 이사무

그는 종전후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전범 재판을 받고

52년 스가모 구치소에서 사망한다

 

방장군은 투항후

중국군의 구출에 힘입어 탈출하고 나중에 타이완으로 와서 여전히 군에 있다가 퇴역한다

 

1983년 그가 타이완에서 병사했을때

 

일본지역의 과거 11군 소속 살아남은 장병들이 조문단을

사적으로 꾸려서 용맹했던 장군의 죽음을 기려 장례식에 참석하였다고 전한다

 

일본11군은 45년 종전후 중국 계림지역에서 무장해제되고 부대는 사라졌다........

 

오늘날 형산의 주변 산야에서 유골이 무더기로 나오는 적이 있고

이 유골이 바로 형산전투에서 희생된 군인들이며

일본군과 중국군의 백골이 말없이 헛되고 비참했던 전쟁을 증언하고 있다

 

오늘 아침 중국텔레비전에서 그 사연을 다큐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