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소동파 황주한식시첩<quarante-quatre>

guem56 2011. 4. 6. 12:04

어느해 봄인지 가을인지

인사동 어느 필방에서

 

일본 二玄社판본의 소식집을 샀다

그 처음에 황주한식시가 실려있다

 

오언시인데 글씨가 법이 자유로와

내 눈에는 못 쓴 글씨로 보였고

 

한식에 쓴 시라 고향을 그리워함은 알겠는데

자구의 문의가 정확히 느껴지질 않아 시도 별로 좋은 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몇 번 글씨를 따라 써 보았으나

별 느낌이 없었다

 

소동파는 정견이 달라 배척을 받아 현재 후베이성 황강시 근처인 황주로

1080년에 단련부사라는 한직을 명받고 전출되어 거기서

3년을 묵으며

한식을 맞아 울적한 심정을 읊은 작품이 한식시첩이라 하며

 

왕희지 난정서

안진경 제질고와 함께 천하의 3보라 일컬어진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글씨가 다시 보인다

 

그런데 내가 오늘 아침

어쩌면 기가 막히게 슬프고

어쩌면 작품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음에 신기할 따름이다

 

추사의 세한도가

압록강을 건너가 베이징을 나들이 함은

중국명사들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그들에게서 찬탄의 글구를 붙여옴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라가 망해 세한도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손재형이 간절한 마음으로 태평양 전쟁후에 찾아 돌아왔다

 

1860년

프랑스 영국 연합군은 자금성에 난입하고

많은 서적과 문화재가 있는 원명원을 파괴한다

 

빅토르 위고는 이를 야만적 행위라 강력히 규탄했고

오늘날 일부 복원된 원명원에는 위고의 글이 걸려있다

 

원명원이 부서지던 때

소동파의 한식첩은 간신히 약탈을 면해 민간에 흘러들었고

 

여러 손을 거쳐

역시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자유중국 외교부장 왕스제(王世杰)이

천금을 주고 글씨를 구해와

오늘날 타이완 고궁박물관에 한식첩은 온전하게 남아있다

 

소동파를 옹방강이 그토록 사모했고

추사는 학문의 길을 가르쳐 준 마음의 스승

옹방강을 본받아 평생 소동파를 역시 귀히 여겼다

 

나는 내 눈이 밝지 못했던 것이

아쉬워서 마음이 처연한게 아니고

천년 세월을 사이에 두고

위대한 작품이 다 일본을 거쳐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머리카락이 쭈뼛할 뿐이다

 

나는 엘리제궁에 걸린 서예작품을 사진에서 본 적이 있다

 

19세기 20세기 서양세력이 군사 경제에서 절대적 우위를 보인 것이

서양작품의 경매시장에서 고가를 유지한 제 1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면 정선의 그림이 몇 억에 팔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는 웃지못할 희극이 사라질 것이다

정선의 그림이 고흐의 그림에 비해 값이 쌀 이유가 없다

 

나는 물론 고흐의 작품성을 존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