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봉하촌장님의 기일에<Cinquante-six>

guem56 2011. 5. 23. 16:24

80년대 초

이 땅에 초가지붕이 사라지고

아직 아파트의 숲은 생기기 전

천연색 tv방송이 시작되어

마르코 폴로의 <동방여행>프로그램 앞으로 시골 아저씨들이

이장님 댁으로 모여들던 그때

 

세상은 역시 지금처럼 어수선했다

팔 줄만 알지 물건 살 줄 모르는 일본 때문에 미국은 적자가 불어났고

그래도 자유세계 특히 한국의 안보를 걱정해서 7함대는 늘 항공모함을 동아시아 바다에 보냈다

세상은 외세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규탄하며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캄보디아엔 핏물이 흥건해서 누구나 다 캄보디아의 평화를 바랬다

 

그 시절

박종환감독이 선수들을 잘 뛰게 해서 청소년 축구 4강에 오르던 때

부림사건이란 공안재판이 있었고 여기에 변호사로 뛰어든 사람이 노무현이다

 

나중에 그는 국회의원을 거쳐 청문회에서 정주영씨를 몰아 세우고

또 다른 심야국회에선 퇴역전직보안사령관에게 명패를 집어 던지며 고함을 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런던에서 기마행렬의 환영을 받는 국빈대접을 받았고

멀리 남미 브라질에 가서는

그 나라를 살린 룰라 대통령의 진심어린 환영을 받았다

 

나는 어릴 때 이나라의 대통령은

영원히 박정희라는 사람인줄 알았다

 

나이를 먹어 세상엔 배고픈 사람도 많고

사기꾼도 많다는 사실을 알았을 무렵

막걸리를 좋아하신다는 박대통령은 세상을 떠났다

 

노무현은 내가 두 번째 내손으로 투표하여 당선된 내 마음의 대통령이다

그가 당선되고 나서 나는 기대감이 높았고

이 나라가 잘될 거라는 희망에 들뜨기도 했으나

 

세상사에 귀 얇은 나는

경제가 시들하고 도대체 뭐든지 발전하는 기미가 안보여서

그를 나무라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노무현

그는 검찰이 제 맘대로 수사하도록 했으며

정보기관의 힘이나 거미줄같은 신경망을 자신의 권력에 이용하지 않았으며

정치적 라이벌 세력을 사찰하지 않았다

 

멀리 내다보고 국가의 군사력을 키웠으며

이웃나라나 먼나라에 할 말이 있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형부자행 추밀불용 강병원려 유언타국 刑部自行 樞密不用 强兵遠慮 有言他國)

 

어느날 그가 그의 지지자들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잦아들었던 때 

많은 시민들의 낮은 지지도와 무관심 또는 비웃음 속에서 퇴임했고

 

그리고 그는 봉하마을로 들어가

클라우드 담배를 불티나라이터로 불붙여 피우는

동네 아저씨가 되었다

 

진시황이 살던 아방궁은 저렇게 작은건지

아무튼 봉하촌장은 집에서 나오면 동네 슈퍼에 들려 담배 한 대를 붙여 물고 밀짚 모자를 쓰고

들녘에 잡초도 뜯고 구경온 세상사람들에게 노래도 한곡조 불러 주시다가

어느날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져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그를 태우고 서울의 검찰로 가는 버스를 중계하던 방송차는

다시 그의 주검이 서울로 가는 길을 중계했다

 

나는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나서

내가 사는 도시 어느 광장에 마련된 빈소에

 

늦은 밤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여고생들 틈에서 절을 한 번 한거 외에는

대통령에 대한 예를 갖추지 못했다

 

세상이란 인생이란 그렇다

년거의쇠(年去意衰)

세월이 흘러갈수록 마음이나 의지는 약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찬 연어가 있듯이

세상사가 반드시 시류를 따르는건 아니다

 

백천(百川)이 서쪽으로 흘러도 큰 강의 물줄기 하나 동으로 흐를 수 있다

 

노무현대통령은 매우 똑똑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죽을 당시엔 비분과 서글픔 그리고 세상에 대한 원망을 안고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는 아무리 똑똑해도 자신의 죽은 뒤 그림자가 얼마나 길지는 혜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그림자는 오래 오래 비췰거 같다

 

어린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젊은 엄마의 손에 든 촛불을 바라보는

밤이 오래 오래 갈 것이다

 

그는 죽었으나

바위에 떨어져 피를 흘리며 몸이 으스러져

세상을 떴으나

 

사람들은 오래 오래 그를 기억할 것이고

사람들은 노무현을 기억하는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나라를 사랑했으며 나라의 힘을 키운 노무현을 기억할 것이다

 

내설악 맑은 물이 감아 흐르던 인제 합강

그 추웠던 산골에서 총하나 달랑 들고

건빵가루를 부셔 먹으며 군대를 때웠던

병사 출신의 대통령 노무현을 천년세월 동안 잊지 않을 것이다

 

어느 봄날 내 마음의 대통령이 이 세상을 떠나신 날

불각루하 매화산인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