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야기

약사리 고개 권진규<Soixante-quinze>

guem56 2011. 6. 14. 13:24

약사리 고개..

춘천의 북동에 봉의초등학교가 있고

남서쪽에 춘천초등학교가 있다

 

이 가운데를 가로 질러

효자동쪽에서 중앙시장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약사리 고개이다

약사리 고개의 동쪽 초입새 봉의학교 바로 아래에는 시내가 흘렀다

 

이미 70년대에 물이 탁해서 손을 넣을 수 없었고

언젠가 시멘트로 덮여서 그 위에서 풍물장이 섰다

나는 그 시내 옆에서 수년을 살았다

 

내 살던 집은 그냥 빈집으로 남아 삼년전에 가 보았을 때는

거의 퇴락하였다

이제 약사천이

물줄기 맑은 환경의 강으로 인공부활하면

그 집자리는 산책로나 주차장이 될 듯 하다

 

그리고 또 약사리 고개를 넘어 미군부대 옆

장미촌앞의 고등학교를 다녔다

토요일 날이면 커다란 코카콜라를 들고 맹물마시듯 하면서

학교 앞을 지나가는 키가 장대같은 흑백의 미군들을 보며

초등학교 때는 소풍가야 일년에 한번 마시는 콜라를 저렇게 매일 마시는 아메리카 시민들의 팔자에 무척 당황했었다

 

약사리 고개를 다 올라가면 죽림동 성당의 입구에서 불어나오는 시원한 바람이 있었고

그 넘어가면 덕수약국이 오래 오래 있었다

 

성당의 반대편에는 구두점이

늘 젊은 일꾼과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구두를 짓는 모습이 커다란 유리창으로 보였고

그 구두점에서 올라가면 망대골목이었다

 

사이렌이 울리는 망대 골목까진 한번도 들어간 기억이 없다

 

가파른 골목이었고 늘 걸어다니는 학생들은

용도가 분명하지 않은 걸음을 할 수가 없었다

아침엔 일찍 가서 교문을 지키는 학생과 선생님의 눈을 피해야 했으며

밤엔 11시가 다 되어 통금을 앞두고 급히 집으로 와야 했다

 

저멀리 미군부대에서 시내를 빙빙 도는 불빛이 밤새

봄내를 보호했고

열한시 반과 열두시에 사이렌에 울렸다

 

어쩌다 열한시 반 사이렌을 거리에서 들으면 급하게 약사리 고개를 뛰어넘어 집으로 와서 곧 자야 했다

 

세월이 화살같이 갔다

 

비행기가 늘 내리고 뜨던 미군비행장은 어느날 흔적없이 땅과 울타리 철책만을 남긴 채 사라졌고 그 많은 미군과 미국인 가족들 또한 떠났다

 

늘 드나드는 미군이 만원사례라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사이 고음의 밴드음악을 토해내던 고등학교 앞의 레인보우클럽도 문을 닫았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인간을 슬프게 한다

 

약사리 고개 넘어가서 중앙시장으로 어쩌다 들어가면

찐빵을 쪄내는 열기와 순대골목의 들척지근한 냄새 그리고

골목길 앞에 가득 나온 야채며 생선들이 휘황했다 언제 보아도 양쪽 가게에서

좁은 골목길 보행공간을 그렇게 많이 삭감해 들어온 그 생선이며 야채 광주리가 사람들에 걸려서 엎어지지 않음은 신기하다

 

봄내를 떠나 봄내로 다시 온 한참이 지난 날

내가 가본 약사리고개는 워낙에 조용했고 중앙시장도 숨이 죽었다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사러온 손님보다

더 많은듯 고요했다

 

사람들은 마트로 갔고 아파트가 많은 동네는 저 멀리에 있었다

 

내가 망루 골목에 간 것은 그 무렵이다

 

한 달에 두세번 거기 아시는 분들이 모여 책을 읽는다 했는데 나는 책을 읽기 보다는 그 망대 골목에 올라 봄내의 동쪽 서쪽을 타고 오르는 희미한 바람의 흔적을 밤 열시쯤

얼굴에 느끼면서 내가 살던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의

이 약사리고개를 걷던 때를 회상했다

 

망대와 성당은 여전히 있었다

 

먹고 사는 일엔 몰입한다기 보다는 수동적으로 매여서 끌려 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생활비와 아이들의 짧은 미래 그리고 아픈 가족들의 건강에 붙잡히고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볼 시간은 증발한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를 졸업한 분이 이주일과 박종환이다

두 사람 다 축구와 인연이고 세상을 웃긴 이주일은

월드컵 운동장에 나타나서 구경하시고는 떠나셨다

망대 거기엔 권진규가 살았었다는 사실은 나는 얼마전에 알았다

 

51세의 나이로 목숨을 끊은 조각가

 

그가 봄내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이곳 망대에서 몇 년간 살았나 보다

 

나는 아직 그의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신문기사엔 건칠을 사용해서 두상조각을 제작했다고 적혀있다

 

내 어릴적 살던 시마을 뒤 매화산엔 옻이 많아 산에 다녀온 아이들이 늘 학교에 와서 가려움을 옮기는 일이 많아 옻나무는 어린 나이에 경계 대상이었다

나중에 춘천댐 돌아가는 굽이의 옻 닭집에서 옻나무 삶아넣은 백숙을 먹었고

 

다시 내가 침과 약을 배운 뒤로 옻나무피를 가져다 가끔씩 달여 그 물을 내어 음식을 만들고는 했다

 

웬지 쑥이나 옻나무 영지 같은 것은 달인 물을 쓰면 오래 살거 같아서

살아생전 뭐든 계량보다는 통밥으로 살아온 나인지라 명확한 근거는 사양하고

그렇게 옻나무피를 썼었다

 

그리고 내가 옻나무에 아쉬움이 많았던 것은 역시 20년전 원주에 와서 사시던

나전의 명인 김봉룡옹이 생각나서다

 

고답한 경지에 오른 작품을 내셨으나 평생 가난에 사시던 그 분을 내가 잠시 몸담었던 사무실의 리포터가 만나고 와서 한탄하던 때...

옻을 찾아서 천리길을 올라오신 사연에 할말이 없었다

 

더운 여름

이제 약사리 고개의 약사천이 산책로로 살아나면 사람들이 다시 몰릴 것이다

 

나는 한때 숨가쁘게 넘어다녔던 그 약사리 고개에

다시 가기 힘들다

 

가슴이 먹먹하게 울리기 때문이다

 

가을이 오면 권진규의 생애가 적힌 책을 읽을 것이고

또한 이 망대 아래서 막노동을 했다고 전하는 박수근의 전기를 봐야 할 거 같다

 

먼나라의 고흐를 늘 생각했는데

고흐는 내 곁에 내가 술마시고 취한 그 자리에서 살다 간 사실을 오늘에야 알고

나는 뼈가 저린다

 

여름날 매화산인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