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야기

난정서루 유공권<Quatre- vingt-cinq>

guem56 2011. 6. 24. 16:35

더운 여름날

곁들여 비까지 주욱 오신다면

때로 서늘한 지하실이 그리울 때가 있다

 

가인 김추자가 다녔다는 봄내 백합여고

아직 김추자가 소풍만 가면 혼자 노래를 도맡아 불렀다는 전설이 식지 않은 무렵

 

언덕위 백합여고 아래로 봄내 시청오는 길가에 병원이 하나 있었고

그 지하에 서실 난정(蘭亭)이 있었다

 

아마 왕희지의 난정서에서 따온 이름이리라

그 난정 뒤의 골목엔 탈렌트 원미경이 어렸을 때 자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난정은 지하라 겨울에는 춥고 공기가 탁했으나 여름엔 들어가면 시원했다

묵향이 은은했고

워낙 장마가 길면 곰팡이 내가 날수도 있었으나...봄날 해가 따스할 때

 

야외 물놀이를 나갔다 놀러 가는게 반은 목적이고 반은

글씨 쓸때 아래 받침 노릇하는 담요를 깨끗이 빨고 햇볕을 잔뜩 먹여놓는 것이다

그래야 여름의 습기를 미리 예방한다

 

난정에 들어가면

시간이 멈춘다 한낮의 더위도

안개같은 시국과 먹고 사는 걱정거리가 숨을 멈춘다

 

그렇다고 다들 신선처럼 팔자가 좋아 거기 와서 먹을 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시간을 채워야 하고 공간속에 죽기전엔 어딘가 머물러야 한다

난정은 그런 인간의 습성이 연장된 공간에 불과하다

 

다만 시간이 멈추고 좀더 다른 장소보다 조용하였고

무엇보다 거기서 보내는 시간은 어떤 목적성이 아주 희미하였다

 

흰종이에 검은 색 글씨를 쓴다는게

요즘은 우리나라가 잘 살고 문화민족이 되어 그런지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고 알아주는 일이 된듯도 한데 아직 유신시대에 글씨를 쓴다는건

쓰는 사람 자체가 적어서 어디가서 나 이런거 한다고 드러내기도 어색할 지경이었다

 

그 난정의 이야길 하자면 하루해가 모자른다

다만 거기서 오래 시간을 보냈다

 

한일자를 팔이 아프도록 오래 오래 쓰고

무슨 습자를 또 하고 서너달 만에 내가 만난 책이

유공권의 현비탑비였다

 

유공권(778~865)은 비파행을 지은 백낙천(772~846)과 동시대인이다

문무를 겸비한 유공권은 90을 바라보는 장수를 했다

그가 남긴 현비탑비는 현재 시안의 비림에 있다고 한다

 

나는 현비탑비의 뜻도 모른 채 그 마른 글씨

내 눈엔 그랬다

마르고 약간 삐다닥한 글씨를 여름과 겨울 그 다음 여름이 올때까지

먹이 튀어서 책의 겉이 지저분하고 너덜할 때까지 따라 쓴거 같다

 

구양순 글씨가 단아하고 세로획이 길어 날렵하고 내눈엔 시원해 보였고

안진경 글씨는 도톰하게 살이 올라 배우는 사람들이 많이 임모했는데

유공권 글씨를 따라 쓰는 사람이 없어 좀 외로운 감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경인년 지난 가을

유공권의 다른 글씨첩 신책군비(神策軍碑)를 구했다

 

현비탑비는 일본에서 나온 책이었는데 이사 다니다 보니 사라졌다

어느해 가을 나는 이 책을 찾느라 온 집안을 뒤졌는데 책의 겉껍질은 남았으나 내용은 못찾았다

 

눈은 흐려지고 손에 힘이 빠진 내가 저 책을 다시 따라 써볼지 그건 모른다

다만 이 더운 여름날

그때 몇 해를 보냈던 그 시원했던 난정의 지하그늘이 어제처럼 손에 잡힌다

 

가끔 봄내시 시청쪽에 가다보면 나는 그 난정의 골목을 일부러 가본다

모든게 바뀌었고 병원앞의 경사진 도로만이 예전과 같다

저녁 무렵 어두운 골목길로 숱하게 걸어내려오던 백합여고의 아이들도 별로 없다

 

시내 외곽의 아파트가 집인 학생들은 거의 교문앞에서 차를 타고 귀가한다

머지 않아 그 백합여고도 외곽으로 이사간다고 한다

 

나는 이제 봄내 어디를 가도 먹먹한 한줄기 회한에 젖는다

아무래도 이 도시를 떠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