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야기

무후사를 찾아서<quarante-cinq>

guem56 2011. 5. 6. 01:29

내 살던 고향

뒤에는 매화산 앞에는 금은산

언제나 눈이 많았다

 

논에 얼음이 얼면 논두렁이 터진다

어른들은 고인 물을 퍼내 얼음을 막고

아이들은 용케 얼음 언 논을 찾아

 

닥나무 껍질로 팽이를 돌리고

현중이 할아버님이 만든 썰매를 탔다

 

봄이 와 먼산에 눈이 녹고 나면

여름 개울에 나가 헤엄을 치기 전

우리는 할 일을 잊는다

 

그 무렵

맹호  지금은 그 성도 잊었다

맹호 아버지께서 화랑부대 근무하시는 분이라

이집은 소득이 높고

하여 책이 많았다

 

잊을 수 없던 책

삼국지  아마 고 신동우 화백의 어린이용 만화로 기억한다

 

총 10권인지 20권인지 모른다

맹호가 그 만화책을 학교로 가져왔다

1,2,3권을 빌려 보아

 

이미 마음이 들뜰때로 들떳으나

가야금 한곡조 띄우고

병풍 뒤로 숨은 기생처럼

더는 빌려주지 않았다

 

분명히 가방안에...

그 무렵

내가 다니던 매화초등학교 아해들은 거의 다 책보를 가지고 다녔다

그냥 보자기에 책을 싸가지고 어깨에 엑스자로 메고 다니던 시절

 

맹호는 가방을 가지고 다녔고

오늘날 나이키

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진골출신이었다

 

분명히 가방안에 삼국지 여러권이 있는데

있는데 요지부동 더 이상은 보여주지 않았다

 

세상 어디나 있는 모사꾼

동샛골 경복이가 이미 더 이상은 패를 보이지 말라는 간신의 임무를 완수한 뒤였다

 

삼국지는

내가 본 삼국지 만화는

유비가 <적로>라는 말을 타고 사지를 탈출하여 험한 강물을 건너는 장면이었다

 

적로 너만 믿는다..그런 장면

유비의 살떨리는 얼굴

험한 물줄기에 뛰어드는 적로의

힘차 보이나 불안한 모습..

 

그걸로 장면은 끝났고

 

시골 책도 종이도 귀하던 그 매화학교

나는 더 이상 끊긴 스토리를 이어갈 능력이 없었다

 

말을 탄 유비의 환영은 수년간 어린 내 머리를 휘감아 돌았다..

 

그때가 68년 봄

나는 정확히 75년 정월달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월남이 망하기 몇 달 전

 

고등학교 가기 전 긴 겨울방학에

내가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살 적에

옆집에서 책장에 모셔진 누가 번역했는지 기억이 없는

삼국지 5권 어른용 전질을

밥을 낮에는 안먹으며 이틀에

걸쳐

 

눈이 충혈된 채

목이 마비된 채 읽어 내렸다

 

끝까지 못보았다

관우가 죽고 장비마저 죽었을때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내 마음에 비통의 눈물이 강이 되어 흘렀다

 

나는 어렸고 아직 세상을 몰라서

삼국지가 해피엔딩인줄 알았다

 

왜 그랬을까?

제갈공명이 있질 않는가?

비바람을 부르고

허허실실을 한다는 전설의 책사

제갈공명이 천하를 통일하는 줄 알았다

 

세월은 흘렀고

살아가면서

나는 두보의 시 구절을 알게 되었다

 

장사영웅루만금(長使英雄淚滿襟)

오래 오래 후세 영웅들을 눈물짓게 하네.....

 

8세기 중엽

세상살이의 신산(辛酸)에 지친 두보는

쓰촨성 청두

제갈량 모신 무후사를 찾은 듯 하다

 

거기서 저 구절을 읊은 듯 하다

 

내가 언젠가 제갈량의 전후 출사표를 읽었고

그리고 이밀의 진정표를 보았다

 

한유의 제십이랑문

소동파의 스승 구양수를 그리는 문장...

 

가슴 절절한 글을 보면서

나 또한 공명선생으로 감정이입이 되어

당장 군사를 독려하여

조조를 잡으로 중원으로 떠났다

 

늘 그렇게 떠나면서

술이 취하고 술이 깨면서

아픈 내 현실을 마취시켰다

 

신묘년 올 봄 나는 무후사

사천성 성도

 

거길 가보고

더불어 두보의 초당도 보려 했다

거길 보고 오면

살아갈 힘을 얻을 듯 했다

하늘은 작은 복을 올 봄에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가 아프고 이런 저런 일이 꼬여 나는

성도로 가기로 한 날 역시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 밤을 보내고 신새벽에 일어나

먹을 갈아 출사표를 써보았다.....

 

1800년 살아남은 공명선생의 유문을

적어 내리며

 

나는 나에게 물었다

 

내가 혹시 적어놓은 글

그게 단 한구절이라도

10년후에라도 살아남을 것인가?

 

아침이 밝아왔고

나는 술과 먹에 취해

붉은 눈으로

맨밥을 물에 말아

두세수저 떠 넣다가

 

새장같은 이 아파트 창밖으로 튀어나가 해를 보고

한줄기 눈물을 뿌렸다

 

풀잎같은 인생

속절없이 가는구나....

 

짙은 허무가 온몸을 휘감았고

그때

아주 오래전에 시달리던

 

유비의 환영이 떠올랐다

 

<적로  저 강물을 건너자

뒤에 나를 잡으러 적이 온다>

 

나도 일상을 털고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말을 휘파람으로 불러

저 멀리 나를 지켜줄 관우와 장비를 찾아 떠나자..

 

글래디에이터..

부하에게 돌아가지 못한

러셀 크로우가 다시 환영에 떠올랐으나

 

그러나 나는 가리라....

살아서 이 강을 건너니라...

 

어느 봄날 깊은 밤

생각이 일어 적노라.........매화산인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