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쁘아띠에에서 온 책 곽희의 임천고치<Quatre-vingt-un>

guem56 2011. 6. 21. 15:29

강릉 초당에 가면 허난설헌 생가가 있다

10여년전엔 한적했는데

요즘은 찾는 이 많아서 휴일엔 둘러봐도 사람의 발길로 번잡하다

 

 

초당에서 두부를 먹고 느릿한 걸음으로

난설헌 생가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면

한나절이 금새 간다

 

남한강이 흘러 경기도로 들어가는 원주 부론

강가로 가기 전에 손곡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여기가 난설헌을 가르쳤다는 손곡 이달이 살던 마을이다

 

 

어디나 농촌이 그렇듯이 작고 아담한 학교 손곡초등학교는 어느 해 폐교되었다

그 건물에 세를 얻어

서화백이 그림을 그렸다

 

서화백은 그 아내인 해인(海印)이 나와 예전에 같이 학교를 다닌 연이 있어

알게 되었다

 

시원한 목소리 만큼이나 뭐든 선이 굵은 사나이다

한술 하시는 분이나 함께 술을 마셔보지는 못했고

여러번 만나 이런 저런 말씀을 들었다

 

 

아이들이 뛰놀던 교실 한켠에 벽난로를 걸고

커다란 작업실에서 서화백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원주시에서 문막가는 길 사제리 언덕에 집을 마련한 서화백은

손곡리에서 집까지 눈이 온 겨울 비탈길을 주로 새벽에 다녔다

깊은 밤듕에 그림을 그리다가 집에 오곤 했다

 

 

어느 해 서화백은 불현듯 파리로 갔다

서양화를 그리는 그는 이거저거 따지면 가기 힘든 길이었으나

프랑스로 갔고

 

파리에서 서남 300킬로 떨어진 쁘아띠에에서 서너해를 보냈다

 

쁘와띠에는 인구 10만이 안되는 작은 도시이나

732년에 샤를 마르텔이

유럽으로 진출한 이슬람세력과 전쟁을 해서

그 기세를 누그러뜨린 역사를 간직한 고도(古都)이다

 

 

쁘아띠에에서 손화백은 손수 밥을 해먹으며 낯선 나라 말을 배워가며 그림을 그렸는데

손곡리로 돌아온 서화백은 쁘아띠에 생활이 몸은 고생한 듯 하나 마음은

......가고 싶은 곳을 갔다 와서 원을 풀었는지 .....편한 듯 했다

 

 

어느날 낮에 집에서 서화백은 책 한 권을 보여주었다

 

<Le message nobles des fores et des cours d'eau>

 

프랑스어로 된 그책은

중국 북송시대 화가 곽희(郭熙)의 임천고치(林泉高致)였다

 

나는 아는게 짧아 그 자리에서 그 책이 임천고치임을 몰랐다

 

나중에 문자향에서 신영주 번역으로 나온 임천고치 책을 구했다

 

 

곽희는 그림을 그리면서 주로 화의(畵意)와 여러 그림 그리는 법을 말했고

그 아들 곽사(郭思)가 정리한 책이 임천고치이다

 

 

문장은 유려했고 전체적으로 산수를 그리는 뜻을 잘 짚었으며

한나라 위진 당(唐)의 서화를 둘러싼 이야기가 종횡으로 펼쳐진 책이다

 

 

곽희는 왕안석과 비슷한 나이였으며

15년 내지 20여년 후학이나 동시대인인 소동파와 황정견의 존숭을 받았다

 

소동파가 적벽부를 지은 때가 1082년인데

곽희는 그 보다 십 년 전 1072년에 유명한 그의 그림 조춘도(早春圖)를 남겼다

 

 

황정견이 귀양길에 이런 말을 했다

이성은 살아있지 않고 곽희 또한 죽었으니 수많은 산과 봉우리를 어이할거나

<李成不生郭熙死 奈此百嶂千峰何>

이성은 곽희 이전 북송초기 화가이다

 

산을 잘그리는 곽희가 죽어서 이제 산을 누가 그릴 것인가? 의 탄식이다

 

 

서화백은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나는 몇 년 전에 원주에 가서 그의 그림 하나를 가져온 적이 있다

 

 

날이 더운 여름

내가 임천고치를 숙독을 할 지

그리고 나도

먼지 앉은 벼루를 내려 먹을 갈아

 

 푸른 물 흐르는 강가에

성긴 나무 두 세그루라도 그려 흰종이에 남길지

여름 햇살과 더운 바람이 답을 알터인데

늘 인간은 앞날을 모르고 자연은 침묵한다

 

세월이 흐른 뒤 내가 다시 이글을 보고 스스로 웃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