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박태보<Quatre-vingt-dix>

guem56 2011. 6. 29. 15:46

빗소리가 커서 새벽에 잠을 깬다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아갈 날 보다 더 많을거 같다는 느낌은

살아가는 사람의 힘을 빼기 쉽다

 

뜨듯한 푸얼차 어찌 보면 무미의 맹맹함 속에서

뜬금없이 박태보가 떠오른다

 

박태보는 외삼촌이 두 분이다

 

동해 푸른 바닷가 바로 옆에 약천이 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누구나 아는 이 시조로 초등학교때 만난 남구만은 동해 약천에 유배온 적이 있었다

그때 이 시조를 지었고 맑은 샘물 약천은 그의 호와 같다

 

남구만의 누이가 박세당에게 시집을 가서 낳은 아들이 박태보이다

 

박세당의 작은 형님 박세후는 일찍 세상을 떳고 후사가 없어서 박태보는

그 분의 가계로 입적이 되었다

박세후의 부인이 윤증의 누이이다

 

그리하여 윤증 또한 박태보의 외삼촌이 된다

 

1689년 그가 설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노량진에서 죽는다

인현왕후를 내쫓고 장희빈을 들이려는 숙종에게 정면으로 상소를 해서

그 글의 책임자임을 자임하고

 

독한 문초를 거의 홀로 받다가 진도 귀양으로 결정이 났으나

혹형의 후유증으로 노량진에서 귀양길에 죽었다

 

그의 문초와 죽음의 과정은 실록에 자세하다

 

윤증은 임오년(1702년)

일흔이 넘은 나이에 원통함과 애석함이 절절한 박태보의 묘표(墓表)를 남긴다

 

남구만의 아들이 남학명이다

이름에 학이 들어서 그런지 남학명은 고고하게 살았다

벼슬을 마다하고 만권서적에 둘러쌓여

은일과 한가로움을 벗했다

 

그는 박태보와 동갑내기이며 외사촌간이다

남학명이 1698년 무인년 봄에 박태보의 행장을 지었다

 

현재 정재집(定齋集  박태보의 문집)에는 남학명의 박태보 행장 글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영민했고 효성과 강직함이 두드러진 박태보는

살을 파고드는 인두날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신음소리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여름 새벽 빗소리에 박태보를 생각함은

날마다 아무 생각없이 아침저녁으로 흔들거리며 사는

풍진세상의 하찮은 인생이

닮을 수도 없고

따라가기도 어려운 선비

 

선비의 모습이라도 생각하면서 잠시

덜 흔들거려보고자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