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할아버지의 말씀...거울과 얼굴<Quatre-vingt-duex>

guem56 2011. 6. 22. 02:25

산에서 나무를 베어오시는 늦은 가을

밭에서 옥수수를 거두시던 뜨거운 여름

 

할아버지는 표정이 없으셨고

가끔씩 나에게 이르셨다

 

사내는 거울을 보들 않으며

풀에 낫을 대다 어쩌다 손에 피가 흐르면

쓰윽 닦을 뿐이란다

 

먼산을 보고

구름이 가는 모양따라

뭉게 뭉게

네 꿈을 피어올려

머나먼 서울로 가서

 

이름 석자를 청사에 남겨야 한다

 

저 누렁소가 음메 울고

송아지 무럭 자랄 동안

나는 찬이슬을 맞아가며

지난 여름 갈무리한 옥수수대를 작두에 썰어

기나긴 겨울 가마솥에 청솔가지를 태워

여물을 끓였다

 

배운게 짧은 할아버지가 너에게 딱히 일러줌이 궁하나

사내는 모름지기

훨훨 타는 아궁이 불빛에

그을음이나

뜨거운 불기운에 얼굴을 찡그리지 말고

깊은 생각 다듬어

 

재주 많은 사람들 가득 모여 사는 서울로 가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말없이 여물을 우물거리는 소처럼

진득하니 책상에 붙어앉아

밤을 새우고 낮을 이어

사서삼경 다 외우고

아는게 잔뜩 쌓이거들랑

술술 풀어서

청사에 이름 석자를 남겨야 한다

 

내가 이 땡볕에 옥수수대를 거둠은

네 살아서 정승이 되고

같은 값이면 글잘하는 대제학이 되어

네 이름 석자를 신문에서 보고자 함이다

 

그걸 욕심이라 하면 내 한없이 섭섭할 따름이다

저 먼 더렁산에서 세월 묵은 도라지를 캐고

물이 푸른 저수지에서 찬물에 발목을 담가가며

수염 길은 메기를 잡아 국을 끓이고

서늘한 가을날에 알알이 떨어진 밤을 

활활 타는 장작불에 구워

네 작은 입에 오물거리는 걸

낙으로 삼고 지내온 세월을

더 환하게 하여

나를 기쁘게 하길 바란다

 

밤이 깊다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잠들지 말고

별이 총총한 새벽까지

낭랑하게 글을 읽어

내가 그렇게 배우고 싶었던

글의 길을 너는 끝없이 끝없이 쉬지말고 걸어가길 바란다.....

 

사내는 거울에 얼굴 볼 짬이 있으면

글을 읽어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