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손열음<Quatre-vingt-douze>

guem56 2011. 7. 1. 15:42

치악산

비로봉에 올라가면 돌탑이 있다

이 돌탑까지 오르다 보면 숨이 턱에 찬다

 

세렴폭포 지나 병풍 사다리길 치악산은

내 느낌엔 가파르다

 

아주 오래전 나는 동무들과 그 산 비로봉에 올랐다

그때가 늦은 오후였다

 

돌탑을 맴돌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다가

오던 길로 내려가거나 입석대나 상원사 가는 길을 골라야 했었는데

여럿이 웃고 떠들고 가다보니

잘못 길을 들어 강림쪽으로 가게 되었다

 

한참을 이미 내려갔으니 다시 봉우리로 가긴 힘들고

가는 김에 이리 가면 어떠리오

 

가도 가도 인가도 없고 마을도 없는 등산로도 아닌

나무꾼 길 같은 그런 길을 내려내려 가다가 밤을 만났다

일행이 열은 넘은 듯 했다

 

불을 피우고 냇가에 앉음돌을 놓고 끄덕 끄덕 졸면서 밤을 새웠는데

그때가 오월같은데 왜 그리 추운지

모닥불 앞의 얼굴은 그런대로 불기운을 쐬었으나 등쪽은 매우 추웠다

 

그래서 돌아앉고 바로앉고를 반복하며 졸다가 깨다가 아침이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인가가 대여섯 옹기종기한 마을을 찾았고 거기 하루 두 번 버스가

들어왔다

 

원주시로 나갔을 때는 점심때가 지난 듯 했다

라면을 한상자 사들고 시내 어느 한옥을 찾았다

거기가 피아니스트 손열음 어머니가 살던 집이다

그때는 시집 가기전 이었으니 30년쯤 되는 시계 저편이다

 

워낙 배가 고파서 밥에 라면에 정신없이 먹었고

김치가 무척 시원하고 달았다는 기억이 있다

열음이 어머니는 그후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을 하면서 결혼했고

원주에 살았는데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

 

어느날 나는 신문에 원주에서 유망한 피아니스트가 나왔다는 기사를 보았고

그 어린 피아노 영재가 최숙씨가 공들여 키운 딸이란걸 알았다

 

내가 중도를 건너다 보는 물가에서 의원행세를 하던 때 최숙씨가 한번 다녀갔다

그땐 이미 열음이의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리던 때다

 

몇 해 전 원주에 가서 열음이 엄마와 해인

그리고 위대하신 연주자 손열음을 뫼시고

밥을 먹는 기회가 있었다

 

늘 사는게 시들해서 그렇게 이름이 센 사람을 마주하고 밥을 먹자니

도새 밥이 넘어가질 않는 듯 했으나 그건 머릿속 생각이고

 

해인이 밥값을 낸 그 달달한 쇠고기 구이는 뱃속으로 잘도 들어갔다

고기를 보고 술을 안마신 적이 없는데

 

워낙에 명사 그것도 나이가 어린 대단한 분을 뫼시고 밥을 먹다 보니

술생각을 잊을 지경이었다

 

열음이가 주인공이다 보니 이거저거 많이도 물어본거 같다

엄마옆에 앉아있으니 어린 아이같기도 하고 때론 워낙 의젓하기도 했다

 

열음이의 말은 잘 기억은 안나는데

 

<나는 아주 연습벌레는 아니다 ...나는 피아노로 대성하고 싶다> 그렇게 두 개의 문장이

 

내가 들은 비교적 긴 여러 대답의 두문장 압축판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어디 번듯한 음악회나 오페라나 연극을 본 적이 없는거 같다

커피와 차를 마신지도 몇 해 안된다

그저 황량하게 살면서 소주를 마시고

음악은 라디오 음악을 들었던거 같고

그림 전시회도 한두번 가본 듯 하다

 

한 때 서너달 FM방송의 음악프로 진행하는 걸 지켜본 적이 있고 보조로 곡을 뽑아 본적이 있으나

그후론 거의 담을 쌓고 살았다

 

열음이와 만났던 짧은 시간뒤 내 머릿속에선

저애는 오래 기억되는 일류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다는 거...

 

그리고 그 애가 어린 나이에 비행기 타고 도쿄며 뉴욕 유럽을 마음대로 가는 거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그 애를 키운 최숙씨의 오랜 공력....그런 것들이 서로 비빔밥속 내용물처럼 얽혔다

 

오늘 아침 내가 텔레비전 아침화면에서 손열음이 차이코프스키 경연에서 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보았다

동영상에 뜬 붉은 드레스를 입은 손열음은 라프마니노프곡을 치고 있었다

 

나는 30여년전 그 애가 태어나기 전에 최숙이 끓여주었던 그 라면을 생각했다

앞으로 30년후 내가 어느 먼 나라 대극장에서 손열음의 피아노 들어보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