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경포호 서호<Quatre-vingt-dix-neuf 99>

guem56 2011. 7. 7. 16:17

비가 오는 날

바다에 가야 한다

 

경포 앞바다는 건물을 사이에 두고 호수와 바다가 있다

 

가능하면 저 건물줄을 치우고 나면

호수와 바다가 이어져

비로소 경포가 제 모습을 찾을 것이다

 

민물고기는 다 사라지고 바닥엔 오물이 쌓여 투명도를 잃어버린 경포호는

이미 시멘트와 아스팔트의 울타리가 지어지던 때 반은 사망했다

 

예전 경포호가 넓었을 때

바닷가 솔밭 난설헌의 집은 경포호 물이 앞마당에 들어찼을 것이고

백두대간 쪽으로 오죽헌도 호수에서 가까왔으리라

 

경포호 앞 바다물은 늘 푸르다

하여 십이난간 벽옥대란 말이 나왔는지 모른다

 

안목

요즘엔 안목에 커피점이 많다

바닷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이거저거 색이 다른 커피를 이름 물어가며 마시는 안목

 

봄가을 여름 겨울 언제라도 좋다

강릉에 가면 사천이나 경포 더 올라가 주문진

내려가서 안목 정동진 어딜 가서 커피를 마셔야 할지 그게 보통 힘든게 아니다

삶에서 결정한다는거 늘 고통이다

 

 

서호

양쯔강 만리 길이 바다로 들어서는 길목

예전엔 서호 물도 바닷물이 섞였을거 라는데 중국사람 말은 바람이 세게 들어가 믿기는 어렵다

 

백제와 소제가 나란한 서호엔 소동파의 흔적이 있다

1089년 소동파가 항주태수로 와서

공금 2000관과 주머니 돈 은자 50냥을 털어

안락방(安樂坊)이란 혜민을 목적으로 한 병원을 지었다 한다

 

승의(僧醫)를 머무르게 하여 병원 관리를 했으며 소동파 자신이 거기에 머물면서

환자를 직접 돌보았다

 

소동파 글에 보면 집안에서 혼절한 며느리를 침으로 구완하는 내용도 있다

확실히 동파는 요리를 잘 했으며 침과 약에 일가견이 있는 의원이었다

 

소동파의 문인 황산곡의 시에 보면

 

자첨적영남 시재욕살지(子瞻謫嶺南  時宰慾殺之)

 

소동파가 영남(광동성 혜주)으로 귀양을 가니 당시 재상이 그를 죽이려 했다...

 

당시 재상은 장돈(章惇)을 말한다

 

옛날엔 이름이나 자에 비슷한 음이 있으면

그런 지명을 가진 곳으로 이왕이면 귀양을 보낼 경우

그 귀양가는 사람에게 큰 해가 된다는 속설이 있어

 

장돈은 소동파의 최종귀양지를 담주(儋州) 지금의 해남도로 정했다

담주의 담글자 오른쪽 변이 소동파의 자인 자첨의 첨자와 변이 같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동파는 해남도에서 풀려나 귀향 도중에 죽었으니

남쪽 섬의 나쁜 기운이 스며서 일찍 죽었는지 알수 없다

지금 하이난 섬은 아름다운 휴양지로 관광객을 불러 들이는데....

 

사람은 서로 바람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부대낀다

 

소동파가 살았던 때 북송은 거란에 시달렸다

소동파는 거란과 등거리 외교를 하는 고려를 몹시 못마땅해 하여 고려를 나무라는 글을 많이 지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이어 조선에선 소동파의 시와 글을 애호하는 사람이 부지기 수였다

 

정다산과 그의 두 아들은 소순 소식 소철 3부자의 3소를 닮았으며

그들만큼 의학 예술 정치 풍류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동인의 줄에 섰던 난설헌의 오라버니 허봉은 한 때 중국사신길에 파주의 율곡을 찾는다

율곡이 모진 가난속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성학집요를 짓는 현장을 보았다

 

그런데 윩곡의 선비상을 예찬했던 허봉이 나중엔 육곡을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때 그때 임기응변 내지는 자신의 감을 믿고 살아간다

서호엔 흙탕물이 넘실대나 밤의 달빛에서 보면 영롱한 물의 바다가 되고

아침 나절에 보면 산자락 안개에 벗하여 눈을 오래 머물게 한다

 

그대

서호에 지금 가기 어렵거들랑

동해 안목에 가서 한 잔 커피를 창넓은 유리너머 바다에 권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