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관중과 티토<Cent dix 110>

guem56 2011. 7. 21. 11:58

관포지교의 고사로 유명한 관중(720?~645)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이다

그가 포숙아의 추천을 받아 원래 적이었던 제환공을 보필하자 제나라는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관중사후에 제나라는 난이 끊이질 않았고 쇠락의 길을 걸었다

북송시대 소순은 <관중론>이란 글에서

세인들이 관중을 명재상이라고 칭하는 대세와는 달리

 

관중이 자신이 죽으면 제나라를 누가 어지럽힐지 알만한 사람인데

간흉을 미리 제거하지 못한 실수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소순의 견해를 미뤄보면 명재상은 생전에 나라가 부강하여야 할 뿐 아니라 죽어서도 오래 안정을 유지할 기틀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유고슬라비아는 2차대전후

서로 다른 민족들이 연방을 유지하며 그런대로 잘 살았는데

통치자 티토가 죽은 뒤 10여년 지나 1990년대에 내전에 휘말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후유증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만약 수백년 지나 어떤 사람이 20세기를 한 인물을 통해 이해하려 한다면

그 대표적인 인물 속에 속할 만한 사람이 전 유고연방 통치자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이다

 

수많은 민족이 좁은 땅에 모여살아서

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에서

그의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인이고 어머니는 슬로베니아 사람이었다

 

동유럽 여러나라를 떠돌다가

1차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군에 배속되어 러시아 군대와 싸웠다

군사적인 공적이 커서 상을 받을 무렵

훈장이 오기전에 큰 부상을 당하고 러시아군 포로가 되어 러시아로 갔다

 

여러 곡절 끝에 이번엔 러시아 시월 혁명에 공산주의자로 가담하고

시베리아지역 옴스크로 가서 러시아 여인과 결혼을 했다

 

유고에 돌아온 그는 스페인 내전에 반 프랑코 지원군을 보내는데 관여했고

2차대전으로 독일군이 침공하자 가장 치열한 게릴라 투쟁을 벌여서

여러차례 황천길 근처를 다녀왔으나 항독전사로 이름을 떨쳤다

 

종전후 그는 미영진영과 소련 양쪽의 냉전체제에서 독자노선을 걸었다

유고는 그의 통치기간중 강대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어느정도 안정과 평화속에 있었다

 

티토가 죽었을 때

전세계 128개 나라에서 4명의 왕과 31명의 대통령이 모여 조문을 했다

이렇게 성대한 장례식은 아마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10여년후 유고는 갈가리 민족별로 찢어지고

거기에 더해

서로 내전을 벌여 무고한 시민들이 무수히 죽었다

 

소순(蘇洵)보고 다시 티토를 평하라면 좋은 점수는 안나올듯 하다

 

사라예보에서 남서로 50키로를 가면 콘지(Konjic)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울창한 숲의

이 도시엔 대규모 지하 방공호가 있다

 

유고군이 티토 생존시에

26년간 32억 유로의 돈을 퍼부어

수백명이 핵공격에서도 지낼 수 있는 6천평방미터의 지하요새를 만들었다

 

티토는 살아서 이 요새의 준공을 보았고

이 요새는 오랫동안 대외비로 유지되다가 올해 여름 여기서 예술 전람회가 열렸다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티토는

어느 나라의 핵폭탄을 무서워 했을까?

그 자신 산악지역에선 신출귀몰한 게릴라 전사이기에 지상 침략군에 대해선 공포감이 없었겠으나 아마도 소련에서 날라오는 핵을 경계했을 것이란 추측을 해본다

 

개인의 삶도 따지고 보면

수십년간 결과로 볼때는 쓸데없는 준비를 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그 준비를 하는 과정이 어찌 보면 삶의 큰 부분일 수 있고

 

여름날 그늘을 좋아하는 게으름 성향의 나는

적금도 보험도 건강도 다 유예한 채

오늘도 그저 사람들이 별로 안보는 책을 뒤적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