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원호문과 추사 김정희

guem56 2012. 3. 2. 16:34

올란도 볼륨이 주연한 영화 킹덤 어브 해븐

예루살렘 성을 둘러싸고

십자군과 무슬림 살라딘 진영과의 전쟁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공성과 수성의 전략

그리고 잔혹한 참상이 가감없이 묘사되어

스토리에도 빠지지만 화면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그때가 12세기 말이고 예루살렘성을 탈환한 살라딘은 무고한 이교도들을 살려두고

떠나는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여 역사속에 용장이면서 덕장으로서 이름을 남긴다

 

1127년

북송의 서울 카이펑

오늘날 차이나 제 1의 국보로 남은 청명상하도에 그 번화하고 은성한 모습이 생생하거니와

대단한 서화가였던 휘종은

국방은 소홀히 하여 그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군에 포로로 잡혀 만주로 끌려가는 수치를 당한다

 

그후 백년이 안된 1232년 임진년

거란의 요나라를 멸하고

북송을 압박하여 양쯔강 항저우로 몰아냈던 금나라는

 

이번엔 징키스칸의 후예 몽골군의 힘에 밀려

현재 베이징에서 무너지고 다시 카이펑에서 수성하다가 완전히 함락된다

 

보중익기탕의 명방을 만든 이동원이란 의원이 있다

유학자이며 금나라 관리였던 이동원은

10년 연하이며 역시 금나라 관원 원호문과

짐작하건데 성이 함락당시 몽골군의 포로가 되었다

 

원호문의 상한회요서라는 글에는

카이펑(변량)에서 이동원과 함께 벗어난 후

6년여를 같이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동원의 원사열전에 기록이 보이고 원호문은 금사에 기록이 나온다

안구사(雁丘詞)라는 유명한 노래로 알려진 원호문은

문재가 출중한 사람이었는데

 

오늘날 원호문의 글이 많이 전하지 않는 이유는

한족의 왕조가 아닌 요 금 원나라의 문사들의 작품이 별로 전하지 않는 커다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복거외가동원(卜居外家東園)이란 원호문의 사(詞)가 전한다

 

십년종목 일년종곡 도부아동 노부유유 성래명월 취후청풍

十年種木 一年種穀 都付兒童 老夫惟有 醒來明月 醉後淸風

 

십년 바라보고 심는 나무 일년농사

모두 젊은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밝은 달아래 술이 깨고

취한 뒤엔 맑은 바람이라...

 

유유자적함이 넘치는 듯 하나

 

그 앞구절을 자세히 보면 금나라 망하고 새로 선 원나라에서 벼슬을 단념하고

영원히 은거하여 필부로 세상을 마치겠다는 뜻이 드러난 글이다

 

지금의 산서성 태원의 북쪽 신저우 시우룽(秀容)이 원호문의 고향이고

거기 또한 외가가 있었고 카이펑에서 목숨을 부지한채 빠져나와 여러해를 유랑한 뒤

쉰살을 바라보는 때에 여기 은거하여 여생을 마쳤다고 보면 된다

 

언젠가 원호문의 남은 글을 얻는 날이 오면 기쁘게 읽을 듯 하다

 

어느 해 초가을

제주 남녘이라서 아직 더울 때

한라산을 홀로 넘은 나는 산방산 근처 어느 거리에 앉아서 하염없이 서녘 노을을 보고 있었고

눈에 추사유허지란 표지를 만났다

 

공부하라고 일러준 중학교 선생님을

삶의 다른 길로 흘러든 졸업생이 골목길에 숨어 피하듯

 

나는 그 표지판을 보고 삼십여분 뜸을 들이다가

저녁 해가 짧은 걸 핑계로 추사선생 귀양살이 하시던 곳을 못가보고 세월이 지났다

그땐 문장과 글씨가 영원히 나에겐 바깥일이라 여겨져서

추사선생 흔적을 더 찾아가기 어려웠다

 

세월이 흐르고 나는 예산 추사 고택에 갔다

관리소 건물과 추사고택이 약간 쌀쌀한 가을날에 햇빛을 받고 있었다

추사선생 산소옆의 묘비석을 둘러보고 절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날이 저물어 여길 나가면

책은 덮습니다

 

장삼이사의 길을 갑니다

절을 올릴 낯도 없으나 어쩌다 보니 이리 되었답니다

 

몇 년이 더 지났다

어느 해 신문 한켠에 서울에서 세한도 전시회가 열린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래서 세한도 진품을 보았고

더불어 전기의 계산포무도를 역시 보게 되었다

열 몇 사람의 발문이 붙은 긴 세한도엔 위당 정인보선생의 글도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글을 읽고 먹을 갈았다면

세한도는 못 그려도 저기 발문에 이름 석자는 누구든 붙여보고 싶으리라

 

전시회 입구에서 파는 도록을 가져갈까 말까 하다가

읽지 않을 책을 사지 않는다

그래도 모르니 이건 가져 가야 한다

 

그런 생각이 몇 번 뒤섞이다가

나는 추사 편지글과 옹방강 서신이 비교적 큰 획으로 남은 도록을 집으로 가져왔다

 

가을이 가고

아카시아 꽃이 피고 지고

그렇게 또 가을

다시 봄이 왔다

원호문처럼

 

나라는 망하지 않았으되

어디 전원으로 돌아갈 곳이 없고

 

하루 한달을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생활이 어그러지는 서민이 되다 보니

책을 읽기는 만만하지가 않다

 

이른 아침 늦은 밤

술마시던 시간을 바꿔 글을 읽는다면

어디까지 갈까

 

사막을 건너 천축국으로 떠나던 때

삼장법사의 나이가 몇이던가

 

더 일찍 바른 길로 못들었다고 후회하던 글이 천년 넘어 전하던데

시간의 길고 짧음을 따지고

총명과 아둔함을 재보는거

또한 와우각상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