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당인 문징명 왕양명 (30)

guem56 2012. 3. 26. 13:07

쓸쓸하게 살다간 고흐보다

한층 더 슬프고 안타깝게 떠난 사람이 모딜리아니인데

 

가난과 술

그리고 세상사람들의 무관심 내지 비난 속에서

시들어간 예술가는 동서고금에 한 둘이 아니다

 

박수란 그가 세상을 떠난지 오랜 뒤에 터져 나온다

 

왕양명이란 사람이 있다

 

국사 시간이나 윤리 국어시간에 양명학이란 용어가 등장하고

주희의 주자학과 더불어 우리나라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정도로 알고 지내다가

조선시대 주류학자들은 대개 주자학을 신봉한 반면에 남인이나 벼슬에서 밀려난 선비들이 양명학을

받아 들였다

 

요정도가 내가 아는 일반 상식이다

 

1520년대 양쯔강 유역의 난창에서 주신호의 반란이 일어났다

명나라 황실의 후손인 영왕 주신호는 군사들을 모아서 베이징 입성을 꿈꾸고 인근 지역에서 엄청난 기세를 올렸는데

 

나중에 당시 명나라 무종이 친정을 해서 반란을 진압하지만

실제 진압의 핵심 주인공은 왕양명이었으며

 

기지를 발휘하고 직접 전투를 이끌어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중앙정계 특히 환관들의 시기로 공은 별로 드러나지 않았고

그러나 역사는 왕양명의 역할을 기억한다

 

 

당인과 문징명은 1470년 동갑으로서

시화로 나란히 사귀고 이름을 남겼다

 

영왕 주신호가 당인을 초청해서 시화를 얻으려 했는데

당인이 가는 도중에 주신호가 포악하고 딴 생각이 있음을 간파하고

미친 척 하여 호구를 벗어났다

 

그후 가난과 실의에 빠진 당인은

양식을 이웃에 구걸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나중에 쉬저우에 가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사주는 이가 없어

시들어 죽었다 전한다

 

세상 인심이란게 누가 죽고 나면 두터워지는지

시간이 갈수록 그의 살아서 풍류와

시화를 높게 쳐주는 갈채가 늘어나

오늘날 당인은 중국 최고반열의 풍류객이나

시서화 삼절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그가 남긴 묵적 만흥(漫興)을 보노라면

세상은 이런 사람을 살았을 때

외면하고

죽어서 애써 찾으니...

 

예술이란 내 살과 뼈를 깍아서

탑을 세우는거란 생각도 든다~~

 

 

'글과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악 형산 황정견(34)  (0) 2012.05.02
홍양호 기윤 사고전서  (0) 2012.04.30
악비 남송의 명장 제갈량 출사표(29)  (0) 2012.03.23
원호문과 추사 김정희   (0) 2012.03.02
이청조 녹비홍수 스물하나  (0) 2012.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