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한유 천리마

guem56 2013. 2. 8. 14:00

  한유는 늘 가난에 시달렸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광동성 소주(韶州 지금의 사오관시)에서 벼슬하던

형을 따라가 형수 손에서 자랐는데 어느날 형이 갑자기 사망하여

 

소주에서 고향인 하남 맹주로 왔다가

조그만 집안 땅이 살아있는 안휘성 선주(宣州)로 갔다

 

가산이 몰락하여

대소 30여 대가족이 먹고 살아야 하는데

땅은 작아서 늘 기근에 시달렸다

 

한유는 19세에 청운의 뜻을 품고

시안(西安)으로 간다

 

당나라 서울로 가서 과거를 3번 거푸 떨어진다

당시 2,30명을 합격시켰다는데 지원자는 2000여명이 넘어 100대 1이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대가족을 먹여살릴 길은

죽으나 사나 과거 뿐이라, 4번째 붙었으나

 

좀 더 높은 벼슬을 하려면 박사과를 보아야 하고

여긴 3번을 거푸 떨어졌다

 

한유는 지방관의 막료로 떠돌다가

서안에 와서 감찰어사 형부시랑등의 벼슬을 하지만

 

가난에 시달려 먹지를 못하니

30대에 이가 빠지고 흰머리가 무성했다

 

민음사 세계시인선에 문고본으로

한유시편이 나와서

그 얇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가난과 신세한탄이 주류이고 시문에 글자가 어렵고

표현은 딱딱하며 이태백시와는 사뭇 달랐다

 

<진학해>나 <사설>같은 글 역시 내용이 어려워

한유의 글을 가까이 하지 못했다

 

소동파는 평생 한유를 존경했다

소동파의 글 <조주한문공묘비>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公不少留我涕滂

翩然被髮下大荒

한유선생 글을 일다보면 눈물이 흐른다네

머리 풀고 넓은 들로 내달리게 된다네

 

소동파의 호방한 문구는

한유의 글에서 영향 받은 바가 크다

일찍이 한유의 시구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翩然下大荒 被髮騎麒麟

넓은 들로 나아가 머리 풀어 헤친 채

기린을 타고 달리리라...

 

 

강직한 성품의 한유는

직언을 잘해서 늘 상급자의 눈에 거슬렸고

좌천과 귀양을 다녔다

 

소동파 또한 그러했다

 

한유와 소동파의 글은

조선시대에 많은 선비들의 애독문이었다

 

연암 정조 다산 추사가 평생 그들의 글을 외다시피 했다

 

한유는 또한 시인 이하(李賀 791~817)의 재주를 알아봤다

 

20세기 장준하 선생과 비슷한 연배의

이병주는

학병으로 가서 중일전쟁이 끝나자 중국 감옥에 억류되었다가 귀국을 했다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이병주는

평소 이하의 시를 좋아했음이 분명하다

 

옛날 월남이 망할 무렵에

이병주선생의 글을 통해 이하의 이름을 듣고

그 시집을 구해놓았는데

 

 

시가 어렵고

귀기(鬼氣)가 흘러 책을 만지작 거리다 말았고

다시 몇해 전에

이하집을 구했으나 아직 못읽고 있다

 

한유나 이하의 글을 읽다보면

아카시아 꽃이 또 피고 질 것이다

 

한유의 글엔

유독 말을 잘 선별했다는 백락이 잘 등장한다

세상엔 천리마는 늘 있으나 백락은 드물다는 글구가 있다

 

 

예전에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천리마는 한유 자신이고

백락이 없다는 말은 큰 그릇을 못알아보는 세상을 한탄한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인재를 찾아서 그  능력을 펼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명제가 정치 경제 학계 어느 분야에서나 화두가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천리마가 없다고 하는걸 보면

 

여전히

사실상 백락이 드문듯하다

 

아니면

사회계층이 안정화 석회화 되어

인재가 나올 가능성이 줄어든

박제가 된 사회인지도 모른다

 

속절없이 이상이 죽어갔듯이 누군가

병들어서 역시 떠나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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