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蘇東坡)

차형공운

guem56 2013. 5. 30. 12:18

10세기 중반

고려시대

 

북에는 거란이 있고

북송이 카이펑에 도읍했던 때

 

북송 신종시대

왕안석의 신법이 등장하여

개혁을 하느냐 마느냐

천하가 들썩였다

 

왕안석과 한때 몹시 친했던 사마광이 신법에 반대했으며

소동파도 반대의 노선에 섰다.

 

구법당과 신법당의 갈등은 얽히고 설켜서

이 방면의 책을 서너권 읽어도 안갯속 같다

 

그런 와중에 왕안석처럼 고금에 욕을 많이 얻어 먹기도 힘들고

그만큼 찬상과 아쉬움의 대상이 되기도 힘들다

 

근래 중국학자 양계초는

왕안석을 천고의 개혁가로 높이 세우고 공을 들여 상당한 분량의 왕안석 전을 쓴다

 

 

왕안석은 음식을 먹거나 기타 생활상에 독특한 면이 많았는데

맛있는거 별로 안따지고 그냥 밥이나 반찬 있으면

한꺼번에 비빔밥 식으로 후다닥 먹었는지 격식있는 식사를 안했다

 

소식의 부친

소순의 <변간론>이란 글이 있어

고문관지에 명문으로 전한다

 

이글에선 간신을 철저하게 해부하는데 그 대상이 왕안석이라고 한다.

글 중에 음식 먹는 방법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아

왕안석을 소순이 아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한 정황은 더욱 농후하다

 

소동파는 오대시안 사건이후 황저우로 유배되어 몇 년을 보내고 풀려난후

양쯔강 물줄기를따라 주장(九江)의 여산을 구경하고

난징 부근에 살던 왕안석을 찾는다

이때 왕안석은 정계를 은퇴하고 강호에 은거한 상태다

 

소동파는 배에서 내려 마중나온 왕안석을 잠시 보고 떠난게 아니라

여러날 이상 묵은 듯 하다

정책과 시문에서 영웅을 서로 알아보고 존경하는 마음이

상호간에 사무침을 알 수 있다

소동파는 이런 시를 남겼다

 

 

 次荊公韻

 

머나먼 길 나귀타고 황무지 언덕에 들어설 때

선생께서 건강하실 때 찾아뵐걸 했었는데

여기다 서너칸 집을 짓고 살아감은 어떠한가 물으실 새

선생따라 십년전에 그랬을 걸 더 아쉽다네...

 

騎驢渺渺入荒陂

想見先生未病時

勸我試求三畝宅

從公已覺十年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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