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man

북송 휘종

guem56 2015. 10. 12. 16:00

북송에 휘종은

서화가로 이름이 남았다

 

그림을 잘 그렸을 뿐 아니라 감식안이 뛰어났고

수금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남겼다

 

1127년 정강의 변이 발생했다

휘종은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 군대에 잡혀서 머나먼 만주 북쪽으로 끌려가 거기서 일생을 마쳤다

황제였고 예술가였으나 말년의 삶은 비참했다

 

예술과 통치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지

아니면 예술을 하느라 정치엔 재주가 없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나

휘종의 살아온 자취를 보면

휘종이 재물을 탐하고 이기적이며 비굴한 성격이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 많다

 

휘종은 추종하며 아첨하는 신하를 곁에 많이 두었다

그리고 가혹한 징세와 엉터리 도량형으로 편법 착취를 했다

왕실의 재산불리기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금나라 군대가 무력으로 수도 카이펑에 다가오자

재빨리 황제의 자리를 아들 흠종에게 떠맡기다 시피 하고

전쟁터와 멀리 갈수록 좋다는 생각에

자신은 부지런히 서남쪽 오늘날 상해 방면으로 도망을 갔다

 

가마로 가다가 길이 더디다고

말을 타고 가다가 배로 가다가

온갖 궁상을 다 떨다가 오늘날 양쯔강 북안 양저우까지 피난을 갔다

 

아들 흠종은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충직한 장군과 신하들이 금나라와의 일전 불사를 주장하고

몇 몇 전투에서 승리도 했건만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서

적당한 선에서 화의할 생각만 했다

 

엄청난 화의금을 약속하고 금나라 군대가 잠시 물러간 틈에

아버지 휘종을 급히 환궁하도록 조처했다

일설에 의하면 부친 휘종이 남쪽에서 혹시 징세를 따로 하거나

황제의 권력을 갈라 먹는 일이 발생할까봐 그랬다고 한다

 

휘종은 그래서 다시 카이펑으로 환궁했고

금나라는 화의금이고 뭐고 그냥 북송을 망하게 하는게 낫겠다 싶어 군대를 다시 보냈다

그래서 부자 2대의 황제와 숱한 황실친인척이며 비빈 환관 궁녀 대신들이 동북으로 끌려갔다

 

고려사에 보면 바로 카이펑이 항복하기 직전에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여기를 방문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때 보고 들은 기행과정의 글이 어떤 형식으로라도  남아있다면 좋으려만

고려시대의 글은 남은 게 거의 없다

 

고려시대엔 국제적인 관계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긴박했다

서경을 중시했던 고려 사람들이 금나라 정벌론을 주장하다가 대거 세력을 잃고

죽어나간 때가 정강의 변이 일어난지 10년 안쪽이다

 

시를 잘 썼다는 정지상도 이때 희생당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쓴지 60여년 지나서 북송은 중국인이 천시하던 만주 여진인들에게 멸망을 당했다

그 자치통감을 간추려 만든 통감이 조선시대 지식인의 필수 교재였는데

통감을 만든 주희가 태어난 때는 북송 멸망후 3년 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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