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조국교수의 글 정조와 김이소...............

guem56 2010. 6. 3. 17:25

21세기초에 한국에 조국이란 이름을 가진 교수님이 계시다

인물이 훤하시고 강연도 잘하셔서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상당하시다

 

나또한 이 분의 동영상 강의를 인터넷에서 몇 번 보고

 

참으로 차분하게 말씀을 잘 하시며

청중이 쉬이 알아듣게 하기 어려운 내용을 잘 전달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말씀의 내용이 이 시대의 시비를 가리시는 것이라

동감하는 바가 많았다

 

조선 정조 시절에 김이소란 인물이 있었다...

1735년에 태어나 1798년에 별세했으며

여러 벼슬을 지내고 좌의정까지 오른 모양이다

 

그 조카이며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묘표를 지었는데...

 

철조삼일(輟朝三日)이란 말이 나온다

조회를 삼일간 폐했다는 뜻이다

 

또한 김이소가 세상을 뜬 뒤

대궐에 들어간 김조순을 보고

정조가 말하기를

 

옥색처연량구왈 이숙서하거(玉色凄然良久曰 爾叔逝何遽)

(정조임금의 용안이 오래 슬픈 표정이 지난뒤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숙부는 어찌 그리 급히 떠났는가?

 

이런 내용을 보면 김이소란 사람이 정조의 신망을 받았다고 생각이 된다

 

 

............................

 

얼마후 나는 조국교수의 글을 인터넷을 보다 읽었다

 

그 글의 제목은

 

<김이소를 닮지 말고 정약용을 닮아라>로 되어있었다

 

김이소와 관련된 조국교수의 글 내용은 이렇다

 

 

 

법치란 뭐냐? 법치는 공안 통치인가? 입을 닫게 하고 법을 지키는 게 법치인가? 전혀 아니다. 법치가 무엇이고 법률가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이계심·정약용·김이소’ 일화에서 되짚어보자. 18세기 조선 정조 시절 황해도 곡산에서 농민 폭동이 일어났다. 관에서 군포 대금을 200냥에서 900냥으로 대폭 올려 징수하자 이계심이 백성 1000여 명을 이끌고 곡산 관아로 달려가 지금으로 치면 촛불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사또가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계심은 산으로 도망갔고 수배령이 내려졌다. 중앙 정계에 있던 정약용이 정치적 격변 때문에 곡산 부사로 부임한다. 그때 좌의정이 김이소였는데, 부임하는 정약용을 불러서 이계심을 붙잡아서 공개 처형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그런데 이계심은 정약용이 부임하는 길목에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시위를 벌인 10여 가지 이유를 적은 문서를 전달했다. 정약용이 이를 보고 무죄판결한 뒤 석방했다. 정약용은 “관이 현명해지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민이 제 몸을 꾀하는 재간을 부리고 관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이계심) 같은 사람은 관이 천금을 주고 사야 할 사람이다”라고 판결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김이소가 아니라 정약용이다. 어느 사회나 김이소 같은 사람도 있고 정약용 같은 사람도 있다. 두 쪽의 대립은 항상 존재한다. 이계심·정약용 그리고 김이소가 얽힌 일화는 과거가 아닌 현재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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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국교수의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듣고 있다

 

다만 김이소는 이 글로 인해 아주 나쁜 사람으로 될 가능성이 있어서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거 같다고 한마디 거드는 것 뿐이다..

 

김이소의 백부 김성행과 할아버지 김제겸 증조할아버지 김창집이 다 신임사화로 죽었고 그 고조할아버지 김수항도 1689년에 죽었다..

 

나는 안동김씨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나 좌의정 벼슬 정도 했으면 시문집이 있을것인즉 인연이 되면 김이소가 남긴 글이나 그의 행적을 알아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점을 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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