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자치통감 사마광

guem56 2010. 9. 7. 17:09

사마광(1019~1086)은

필생의 라이벌 왕안석(1021~1086)과

거의 동시대에 살면서

송나라의 개혁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소동파는 사마광보다 17년 후배로 왕안석의 신법당에 반대하는

구법당이었다

 

송나라의 왕안석 개혁은 이념은 좋으나 실천하긴 어려운 것이었는지

기득권의 반대로 주저앉은 건지 워낙 복잡하여 쉽게 알기 어렵다

 

다만 송나라는 12세기 초엽 1126년에 신흥세력 금나라에 휘종이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고 지금의 항조우로 수도를 옮겨 남송시대로 되고

 

금나라에 핍박을 받다가 13세기엔 원나라에게 멸망한다

 

사마광 소동파 시대는 송나라 문인들의 시화며 글이 대단히 성했다

사마광은 은거하여 산수의 멋을 즐긴다는 독락정기를 남겼는데

 

그는 또한 자치통감이라는 방대한 역사책을 남겼다

 

주희는 자치통감을 간략히 엮어 통감강목을 만들었고(주희의 명에 의해 제자가 엮었다고도 한다)

바로 이 통감강목이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선비들이 글을 배우는 역사교과서였다

 

조선시대에 삼국사기나 고려사가 얼마나 누구에게 읽혔는지 잘 모르거니와(대단히 부끄러운 사실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이 통감강목은 사서삼경만큼 읽힌 책이다

 

주체적인 역사서라 불리는 제왕운기를 보면 그 체제가 중국사를 먼저 시로 쓰고 한국사는 그 아래에 마치 용비어천가와 비슷한 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사마광은 정치가이며 문장가였다

사후에 그에겐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렸는데 문정이란 당시 문장의 으뜸과 높은 도덕성을 가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시호라

문정의 시호를 받은 사람은 사마광과 범중엄 두사람이라 한다

 

소동파의 문인이며 많은 시화를 남긴 황산곡이 사마광의 만사를 지었는데

이런 시구가 있다

 

毁譽蓋棺了  于今名實尊(훼예개관료  우금명실존)

 

비방과 찬사는 관뚜겅과 함께 덮이는데

지금 사마공의 이름과 진명목은 더 높구나...............

 

원래 개관이란 말은 두보가

장부개관사내정(丈夫蓋棺事乃定)이란 시구에서 읊은 것이고

사마천이 말한

일사연후시비내정(一死然後是非乃定)이란 말과 문의가 통한다

 

약소국에 살아서 그런지

100년전에 방방곡곡 서당에서 글소리 요란하던

통감감목의 원저자가 사마광인데

요즘 전국에선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이 밤늦게 학원버스를 타고

졸면서 돌아간다

 

차후 100년 200년이 흘러가면 이땅의 아이들은 또 어떤 글을 읽을 것인가?

무슨 스페인어나 러시아어 책 보고 공부하는거 아닌지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