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와 화채봉 가던 날
푸른 동해에서 바다를 보다가
울산바위 보이는 미시령을 오르노라면
다시 여길 언제 오나
한 달 뒤에 다시 와도 그런 회한에 젖는다
눈덮인 한계령을 넘어가다 보면
차가 굽이를 돌을 때 무척 꺽이는 느낌
그리고 낭떠러지에 유리창 한켠이 다가갈 때
소변이 나올 거 같은 긴장감
그래서 나는 늘 미시령 한계령 그리고 진부령을 섞어서 넘고
다시 넘어온다
설악을 지나 오고 간 기억은 그렇게 많은데
마치 북녘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의 산하처럼
언제나 아침에도 밤에도 그립다
불현듯....
80년대 어느 해 무더운 여름
나는 안나와 설악에 들어갔다
내가 대청봉을 스무번은 넘었을 것이나
안나와 둘이 설악을 밟기는 처음이다
안나와 나는 화채봉을 넘었다
화채봉
처음 가보았고 아직까진 마지막으로 가보았다
안나는 산을 잘 탔고
나 역시 병약한 몸이었으나 고향이 시골이고
어렸을 적 늘 산에서 놀아서 그런지
긴 산행을 잘했다
백담사로 들어서 화채봉으로 갔는지 오색으로 들었는지
아무튼 그 기억이 없다
다만 대청봉에서 희운각으로 빠지는 낯 익은 길을 접고
안나와 나는 화채봉으로 접어 들었다
그 길이 초행이고 무척 멀고 험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안나는 설악산에 두 번 째인가 오는 거였지만
그 시절 안나는 나를 산에서 만큼은 신뢰했다
저 높은 봉우리
아득한 능선을 거쳐 무사히 어둠이 오기 전에 바다로 가리란 걸
사실로 생각했다
내가 그 화채봉 등정의 코스를 사진 찍듯이 기억 못하는 원인은
하나다
나는 안나와 이 산
그리고 이 화채봉을 자주 올것이다
그리 생각했기 때문에 매일 마시는 차처럼
오늘 내가 이 찻물을 커피포트로 끓였는지 아궁이에 불을 때서
시간의 뜸을 들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으리라
그런데
그게 아직까지는 안나와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나는 그게 한없이 서럽고 한없이 슬프다
화채봉엔 바위가 많았다
능선에 햇살이 따가웠으나
바람이 동서 남북 사방에서 불어왔다
땀이 나는 듯 땀이 식었고
안나와 나는 산행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설악에 오래 머문 산의 신선처럼
갈 길을 재촉하지도 않았고
설악의 장관에 크게 경탄하지도 않았고
서로 옆에 있어서 잔잔하게 즐거웠다
만약 이승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열 개정도 꼽으라면 그때
화채봉 가는 길이 <나는 가수다>에 탈락은 면할 성적일 것이다
등의 배낭에서 물을 마시고
오징어라 하자
뭘 먹으면서 그렇게 그 긴 능선을 타고 갔다
화채봉은 사람이 다니질 않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단 한팀도 한사람도 안만난거 같다
저쪽 대청봉
저아래 천불동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긴 산길을 걸어갔다
만약 그날 그 산행 하루가 인생의 전부였었다면
나는 지금 긴 내인생 전체와 바꿀거 같다
날이 어둡기 전 산에서 내려왔다
아마 오색이던지 백담이던지 꼭두 새벽에 떴으리라..
한창 산을 다닐때 나는 백담에서 마등령을 거쳐 바다에 왔다가 다시 그길로
백담사에 간적이 있었던 듯 하다
설악은 그만큼 나에게 언제 가나
내 고향 살구꽃 피던 마을의 그 할아버지 계시던 방 같았다
설악에 들면 다리 아픈 줄 몰랐고
세상 만사를 잊었었다
산에서 나오면 몸이 너무 지쳐서 물론 다시는 설악에 안오리라 한 적도 많았었다
안나와 나는 권금성 쪽으로 내려온 듯 하다
배가 고파 설악동에서 몹시 밥을 사먹고 싶었으나
바다를 보면서 생선회를 먹고 싶은 생각도 컸다
영금정 그리고 가려 했다
속초 터미널 앞에서 영금정으로 가다가
어느 작은 횟집에 들었고
손님이 없는 그 집에서
푸짐한 생선회를 먹었다
그
게 안나와 둘이서 맛있게 먹은 생선회
시간에 쫓기지 않고 먹은 아직까진 마지막 회였다
안나는 회를 좋아했다
바다가 보이는 강릉
강릉사람이었다.....
고향에 살아도 여전히 고향을 그리워 하는 사람이 있다
아내와 함께 살아도
아내를 그리워 하는 사람이 있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
안나는 살아 있으되 산 사람이 아니었다
대개 밥은 서서 먹었고
잠은 의자 위에서 잤다
물론 나도 그랬다
텔레비전은 재미난 드라마를 연속으로 볼 수 없었고
친척집엔 어쩌다 한 번 가면 다시 갈때는 수년만이었다
안나는
그냥 보통 여염집 여인이었으나
체력은 무척 강했다
세월 앞에 건강이 쉬 무너질 사람은 아니나
자폐라는 병
보기 드문 중증
게다가
두 형제가 서로 누가 자폐증이 더 심한지
전문가도 헷갈리는 두 개의 전쟁터
아픈 아이들 둘을 데리고 다니는 모진 세월은
안나의 마음과 몸을 갉아 먹었다
나 또한 그렇게 되었다
화채봉
다시 거길 안나와 갈 수 있을지
나는 살아서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나도 그러했으리라....설악은 여기서 차로 두시간인데
거길 살아서 다시 갈 수 없는 안나와 나
우리는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으로 살았던 것이다
감정은 늘 넣어둔 냉장고의 위치를 잊을 지경이고
안나가 큰 애를 데리고 어딜 가면
낮에 어디 맡기거나 병원을 가거나 가면
나는 작은 애를 데리고 밥을 먹여야 했다
때로 안나가 산행을 한 적이 있고
나도 산행을 한적이 있다
그러나 결코 둘이는 갈 수 없었다
또한 아픈 아이들을 데리고 네 사람이 산에 간적이 있었다
안나와 나에겐 산에 간게 아니라
전쟁을 하러 간
살아 올지 모르는 미지의 전투를 앞둔 병사들 처럼
조심 조심 높은 산을 올랐고
더 조심해서 산을 내려와
산을 벗어나 집에 왔을 때는 긴 한숨이 저절로 나왔었다
산행의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산사람이 생고생하는 저승길 걸어가는 기분으로 살아돌아온 산행이었었다
그렇게 그 아이들을 데리고 대청봉을 오른 적이 있다
먼 여행
길이 끝나는 곳에 새로운 여행이 시작 된다
내가 안나와 함께 다시 둘이서 화채봉이나
다른 어떤 긴 산행길을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은
삼사년 된다
이 세상에 칼이 안들어가는 적은 없다
나도 그렇고
안나는 절망의 늪에서 죽지 않고
죽은 듯 살았다
새벽에 울고 있는 안나를 보면서
나는 의자에 걸터 앉아서 소주를 마신 적이 많다
만약 이승을 떠나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안나와 다시 산다고 말하기 어렵다
안나에게 다시 이런 고생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안나와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 있다
<신은 인간에게 감내할 만큼의 고난을 준다>
고난도 고난 나름이라고 신에게 별지 답안지에 적어보이고 싶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군대처럼
지난 날 두 번 사시 살고 싶지 않은 시절을 안나는 견뎠다
나는
내가 그 고생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군대는 다섯 번 쯤은 웃으면서
다녀올거 같다
내가 제대할 때 역시 그랬다
다른 병사들 처럼.....
다시 이 부대에서 와서 피고 지는 아카시아 꽃을 보라하면
나는 자살한다
그리고 부대를 나왔었다.......
어느 봄날
흐린 창가를 바라보며
매화산인 적는다 <유리안나는 가톨릭 명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리아의 죽어가는 사람들<Quarante-neuf> (0) | 2011.05.18 |
---|---|
로트레아몽을 알게 된 봄...<Quarante-huit> (0) | 2011.05.07 |
아침밥<vingt-huit> (0) | 2011.02.17 |
세로토닌 ...아침에 일어나는 것 담배 카드 컴바둑<vingt-duex> (0) | 2011.02.02 |
열자(列子)....팔을 들어 반찬을 집을 힘이 있는가? Un (0) | 2011.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