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리 이야기

해바라기와 저수지<Quarante-sept>

guem56 2011. 5. 6. 16:04

 내 어릴적 매화초등학교는 우물물을 길어 먹었습니다

두레박이 풍덩하면 6학년 학생들이 물을 떴고 큰 주전자에 담은 물을

1학년 교실에다 놓고 가곤 했더랍니다

 

그 우물 옆과

교장선생님 사시는 사택 주변엔 해바라기가 흐드러졌습니다

여름이 가고 해바라기가 꽃이 무거워 고개 숙이면 가을이 옵니다

 

마침내 꽃이 그리고 씨가 그 줄기에서 떨어져 나오면

아이들은 해바라기 대를 베어 칼싸움을 하고 놀았습니다

 

교장선생님 댁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 광섭인 저보다 2년인지 위이고 그 형 상섭인 저보다 또 2,3년 위였을 겁니다

광섭이 형은 잘 놀고 명랑하지만 상섭이 형은 말수가 적고 뭔가 어른스러웠습니다

 

그 상섭이 형이 중학교 가기 전

늘 가을이 오면 해바라기 줄기를 베어서 놀았습니다

힘이 약하고 얼굴에 핏기가 가신 저는 해바라기 굳센 줄기를 땅에서 뽑거나 베어내기가 어려웠는데

 

상섭이 형은 늘 굵직한 놈을 골라 손잡이를 낫으로 잘 다듬어 제 손에 쥐어주고

아이들이 편을 갈라 놀 때

놀이할 줄 모르는 저를 같은 편에 넣어 저도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었습니다

 

겨울이 왔습니다

어린이들이 가고 싶으나 너무 멀고 추워 갈수 없는 먼

개울 건너 금은산 아래 저수지

거길 가야 할 때가 왔습니다

 

저수지는 두 개인데 더 먼 작은 저수지는 근처 부대에서 숱한 군인아저씨들이 스케이트를 타러 다니셨습니다

 

어깨에 가죽에 덮힌 흰날을 단 스케이트를 걸고 아침이면 군인아저씨들이

시마을 동네를 지나

그 작은 저수지로 아스라이 떠났습니다

 

어느날 상섭이 형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거길 간다 했습니다

시골이고 워낙 못 살다 보니 장갑이며 모자가 시원찮아

바람이 숭숭 새는 복장으로

저 개울을 건너 머나먼 저수지로 간다

 

순간 겁이 덜컥 났지만 상섭이 형은 나를 당연히 데려 가는듯이 바로 뒤에 세우고 떠났습니다

 

계단식 논

논두렁을 오르다 보면 세찬 바람이 쌓인 눈 송이를 날리며

얼굴로 날아왔습니다

 

아무튼 저수지에 갔을때

커다란 굉음이 펑 펑 마치 대포소리같이 울렸습니다

 

그날은 마침 스케이트 연습하는 군인아저씨들이 없었고

텅빈 저수지에선 이상한 소리가 연신 들렸습니다

 

얼음이 너무 두껍게 얼어

얼음판 전체가 깨질까 그랬는지 중간 중간에 커다란 얼음구멍을 해놓았습니다

 

낚시용 구덩이 인지도 모르는데

물론 거기엔 눈을 주변에 잔뜩 싸놓아 위험 표지는 된 셈인데

어린 제 눈에는 그 두꺼운 얼음벽 안에 시퍼런 물웅덩이가 저를 부르는 듯 했고 너무 무서웠습니다

 

상섭이 형은 그 구덩이 가까이

저는 상섭이형 바깥 옆구리 그렇게 손을 잡고 거기를 지나갔습니다

 

그날 오후 배가 너무 고픈 채 나는 집으로 왔습니다

내가 저 먼 작은 저수지를 생애 처음으로 다녀 온 사실을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할머니는 교장선생님 사모님인 상섭이 어머니한테 이 사실을 알릴 것이고

상섭이 형은 엄청 혼날 것이라...

 

세월이 갔습니다

상섭이 형은 인근 20리길 아래 중학교를 매일 다녔습니다

검은 교복을 입고

아침 일찍 그 먼길을 걸어내려가거나 버스 반 만한 합승을 타러

협동조합 유리창 앞에 서있는 상섭이 형을 가끔씩 보면서

 

다시 해가 바뀌고

그 형은 시야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읍내 고등학교를 간 것입니다

 

어느 일요일

어느 방학

형은 다시 매화 학교 운동장에 나타났지만

 

그리고 나를 보고 씨익 웃었지만

예전에 나를 감싸던

형이 없던 나에게 형같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형은 키가 너무 커버렸고 얼굴을 거무틱틱 한것이

예전에 나를 감싸던

형이 없던 나에게 형같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군인아저씨 같은 고등학생이라

내가 말을 붙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겨울 설이 될 무렵

형은 무얼 열심히 외웠습니다

 

그게 당시 나의 영원한 대통령 지만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선포한 국민교육 헌장이었습니다

나는 어디서 구한 국민교육헌장을 읽고 또 읽고 뜻도 모르면서

외웠습니다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역사를 창조하자....1968년....>

 

날마다 날이 새면 이걸 다시 혼자 외웠고

저녁 놀이 질때

 

서쪽 울밖으로 나가

막차로 들어오는 합승을 보면서 우리집엔 손님이 올 사람이 없는데

그 합승이 저쪽 동샛골 어귀로 올라오면 그 합승을 쳐다보는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럴때 다시 헌장을 외웠습니다

헌장을 내가 외우면 월남간 청룡부대가 더 잘 싸울거 같고

우리집 울타리 동남쪽 상봉이네 아재인

해식아재가 월남에서 살아올거 같았습니다

 

어느날 겨울인데 눈이 한창 더 왔고

정말 동네 개들이 나와 눈위를 한없이 뛰어 다닐적에

우리는 논에서 썰매을 탈 수도 없었습니다

 

엄청난 눈이라 그 논에다

눈 집을 만들고 눈사람을 만들고

상섭이 형에 오랜 만에 아이들과 놀아주었습니다

 

눈집안은 참 컸는데 무너질까 무서웠지만 거길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도 모르게 헌장을 중얼거리는데

상섭이 형이 씨익 웃으며

야 너 머리 좋다 그걸 잘 외우네....나는 외우다 말었다....

 

나는 몹시 실망했습니다

형은 헌장을 거꾸로로도 외울 줄 알았는데.....

 

아무튼 그렇게 겨울 하루를 놀고 상섭이 형은 다시 안왔습니다

 

새 봄이 오고

김영찬 교장선생님 내외분과 광섭이 작은 형이

저의 집에 와서 어느날 저녁을 드셨습니다

진수성찬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인지 그 다음 날인지

트럭이 교장사택에 왔고

 

며칠 후 매화학교에는 새 교장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읍내에서 공부하던 상섭이 형은

그날 나는 헌장을 못외웠다

이 말을 남기고 내 곁에서 떠났습니다

 

살아서 그 형을 내가 만날 지 나는 여전히 모릅니다

때로 나도 꿈을 꿉니다

 

도지사나 아니면 경찰서장 같은 사람이 되어

내 보고 싶은 사람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사람들을 검색하여

만나고픈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가을 날

해바라기 대를 베어 정성껏 오래 오래 다듬더니 내 손에 쥐어주던

그 큰 선물을 생각하면서

나는 먼 옛날 내 고향으로 잠시 다녀옵니다

 

어느 봄날

세월은 희미해도 내 기억은 한시간 처럼 생생한

상섭이 형을 추억하며

매화산인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