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없던 때
어두우면 호롱불을 켜거나 초를 켰다
산을 오르고 산사에 들면
공양간 벽에 그을은 검은 불의 잔해를 보노라면
세월을 읽을 수 있고 언제 걸렸는지 알수 없는 무쇠솥이
인간 평생살이를 장난스럽게 웃는 듯 하다
오세암
내설악을 흐르는 숱한 물굽이를 봉정암쪽으로 지나다 산으로 들어 얕으막한 고개를 서너번 돌아 넘으면
사방이 봉우리 안에 고즈넉이 앉아 있는 천년 세월의 암자이다
그 오세암에 장작을 때고
초를 켜던 시절에 나는 거기서 잠을 여러날 잤다
살아온날을 뒤돌아 본 적이 별로 없고
돌아보아도 아쉬운 날은 더 없던 내가 가끔씩
먼 산 눈이 오는 겨울이나 아주 더운 여름
차라리 추위가 그리울 때
오세암이 떠오르고
눈이 켜켜이 쌓이는 동짓달 전 시월의 하순에 오세암에 들어 이듬해 봄
봄 눈 녹을 때까지 거기서 머물렀지 못함이 아쉽다
사실 그럴 만한 기회는 없었다
지금은 설악도 예전같지 않아 눈이 깊이 쌓이지 않으나
30년전 아직 킬로만자로 지붕에 만년설이 두껍던 그 때 설악의 겨울눈은 대단했다
내가 잠을 잤던 여름날은 오세암엔 촛불이 켜졌고
나무를 때서 밥을 했으며 절사람은 젊은 스님 하나였다
밥하시는 공양주가 들어서고 전기가 들어오면
절은 내 눈엔 거의 생명이 다한다
하여 나는 가는 절은 있으나 가고 싶은 산사는 없다
촛불의 미학이던가
가스통 바슐라르의 그 책을 나는 지루해서인지
내가 머리가 이해못할 정도로 허술해서 인지
세 번 읽어보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여름날이라 하더라도 해가 저물면 오세암 앞 시내
발을 담글수 없을 정도로 차던 그 물
그리고 허기진 배를 달래며
소금이 허연 무짠지를 먹던 밤
그 촛불을 여전히 그리워 하여
나는 바슐라르를 내가 수백번 읽었다고 늘 혼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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