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리 이야기

닭바위의 전설 <Soixante-quatorze>

guem56 2011. 6. 13. 13:46

 

 

홍천군은 동서로 길다

그리고 면적은 넓다

 

서면 사람들은 청평이나 가평 또는 서울까지 가서 장을 보고

동쪽 내면 사람들은 강릉으로 생선을 사러 간다

 

홍천읍엔 화양강이 흐른다

예전에는 화양강건너 편엔 집이 드물었으나

지금은 강의 남북으로 다 아파트가 들어섰다

 

화양강엔 닭바위가 있다

닭바위는 실제로 있는지 아니면 물길따라 길을 내고 공사를 해서 없어졌는지

그리고 위치가 어디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동면 수타사 가는 다리 근처에

석화초등학교에서 강으로 내려다 보이는 어딘가를 대개 닭바위라고 한다

 

강원도 사람들은 감자바위란 말을 스스로 쓰기고 한다

홍천 사람들은 닭바우 출신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내가 마카오 최를 만나면 닭바우서 놀던 시절을 떠올리고

닭바우란 말을 오랜만에 건네고 내 귀로 듣기도 한다

 

예전에 다리가 없던 시절엔 도사공이 배를 저어 사람을 건넸다

70년대 들어서 사공은 배와 함께 물을 떠났다

 

산이 많은 홍천은 백두대간 줄기에서 나무가 많이 나와

인제와 함께 뗏목을 만들어 한강줄기에 띄웠다

그런 전설의 시대가

댐에 막히고

희미해졌으나 5,60년대에도 여전히 나무는 신작로를 따라 쉬지않고 서울로 서울로 올라갔다

 

제무시....1912년에 미국 뉴욕 자동차 쇼에 나와

그 힘을 보여주고 넓은 아메리카 온갖 공사판을 누비다가

이차대전때 군용으로 60만대를 생산했다

 

그 차가 GMC이고 625때 한국에 실려왔고

전쟁이 끝나고도 강원도 땅에 숱하게 남아서

나무를 실어 날랐다

 

험한 산길을 제무시는 훨훨 날아다녔다

통나무를 차의 길이만큼 하늘 높이 실은 채

산길 개울물을 제무시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제무시를 가진 차주는 대단한 부자였다

마카오 집안은 재물이 넉넉했다

부친께서 제무시를 다섯 대 운영하시는 홍천 제일급의 목상이셨다

 

그 집엔 지프차가 자가용으로 있었다

 

마카오는 어린 날 동생 술이와 자가용을 타고 다닌 화려한 추억을

아주 가끔씩 십년에 한번

술이 거나하면 붉은 눈가에 감회를 잔뜩 넣어 넣어 회상하곤 했다

 

홍천 공작산 들어가며 서석 내면으로 빠지면 고개가 하도 많아

웬만한 차는 들어갈 수가 없고 겨울엔 특히 더하다

그 많은 고개가 지금은 다 평탄해 진 곳이 많고 아스팔트 옷을 입어

산골은 험한 모습을 잃었다

 

산이 험한 것처럼 목상은 경기를 타고

어느날 사업은 멈췄다

 

마카오 나이 아홉 살

마당 넓은 집 먹을거 많던 부엌을 떠나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제무시는 어디론가 새 주인을 찾아 떠났으며

마카오의 부친께서도 병으로 이승을 떠나셨다

 

내가 마카오와 만난 건 열두살 때였고

이래저래 해마다 한두 번은 본다

 

그의 이름 마카오 최는 언젠가 내가 붙여준 별호이다

 

머리를 뒤로 넘겨 기름을 발랐고

코트나 바바리를 좋아해서 늘 신사의 풍모가 저절로 배어나왔다

한번 부잣집 아들은 영원한 거다

 

가난이 뼈에 사무친 고등학교 시절

대학다닐 때에도

마카오는 가난해 보이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폼이 합석한 사람들을 취하게 하였고

말솜씨가 옥쟁반에 구슬이 굴러서

늘 화제를 풀어 끝나는 술자리를 마냥 아쉽게 만들었다

 

마카오와 나는 술을 마시면서 말을 풀어내면

우리는 수십가지 직업을 바꿀 수 있었고

웃기자면 찜속에서 끓고 있는 죽은 아구까지 웃게 했다

 

마카오는 어느 건설회사에 들어가서 부산 포항 서울을 떠돌았다

늘 부산에서 전화가 왔다

<어이 솔이 여기 회가 좋은데

이거 먹자니 네가 생각나서 전화 했다.....>

 

밤 아홉시 넘어 술기운이 잔뜩 묻은 전화가 오면 가을이 갔다

 

내가 부산에 포항에

마카오를 보러 한 번 꼭 가려 했으나 못갔다

바닷가에서 그와 함께 파도소릴 들으며 술을 마셨다면

나는 그 말한마디 그리고 그 횟집 벽에 붙은 차림표를 십년도 더 정확히 외우고 다녔을 것이다

 

세월이 갔고 그는 갑자기 회사에서 사직을 당했다

 

어느 해 봄 그가 더 이상 회사원이 아니던 그 전해 가을

나는 홍천의 닭바우를 생각하면서 홍천의 아서원 옆 만석집에서 곱창을 먹었다

 

영업시간이 끝날 무렵 다시 옆 실내 포차로 자리를 옮겨서

전설의 주만호와

홍사장 해서 대여섯이 모였으니 누구 하나 먼저 나가자는 사람이 없었고

몸의 상태가 이제 맛이 많이 간게 분명한데

닭바우의 존심이 남아서 연신 술을 시켰다

 

그때 마카오가 전화를 받는지 걸었는지

핸폰을 건네 주었다

 

멀리 시카고에 산다는 결혼을 곧 한다는 미스 김을 바꿔 주었다

(솔이씨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늘 이야기 했습니다

건강하게 사시고 서울 들어가면 뵈올께요)

 

나는 술 때문에 발음이 흐트러질까 염려되어 짤게 말했다

<내년에 결혼식장에서 뵙습니다>

 

마음이 착하고 남에게 굴곡을 보이기 싫은 마카오는

그 이듬해 갑작스런 직업의 상실로

늦결혼을 포기했다

 

미스김은 시카고에서 들어오지 않았다

 

서울 어린이 대공원 근처엔 아직도 주택이 많다

마카오가 부동산 중개사 시험을 본다고

어느 해 여름 닭바우 모임에 한 번 빠지더니 작년 여름

대공원 근처에서

여동생 술이와 작은 부동산 사무실을 냈다

 

<개업식도 안하고 그냥 사무실 냈다는 연락만 한다>

 

그 전화 받은 한달 후 내가 서울 마카오의 숙소 근처에서

그를 만나 오후 세시부터 이야길 하다가 새벽 두시에 끝나서

밤택시를 타고 내려왔다

 

저번 주말 올여름에 닭바우에서 만나자는 주만호의 문자가 왔다

 

나는 마카오가 내려오면 가고 안내려오면 안갈듯 하다.

 

마카오는 우울증 이야길 했다

(갑자기 직장 그만두고 사람이 끊기니 우울해지더라 어느 날은 3일 이상 밖을 안나간 적도 있다 요즘은 벗어난거 같은데 그거 참 무섭고 남의 얘긴줄만 알었더니...)

 

내가 답을 했다

 

<천군만마를 거느린 대장군에게도 우울증은 온다

내가 관상을 본다 그리고 관상책을 어지간히 읽었다

삶의 흔적...앞으로 가야할 흔적이 궁금해서

마카오 자네 얼굴엔 돈이 모일 상이 있다

 

하여 오래 살아야 하고 총기(聰氣)를 잃어버리면 안된다

네가 돈을 못벌고 이대로 살다 떠나면

닭바우가 너무 슬프다

 

나는 미래를 본다

수백억은 벌어야 사라진 제무시 다섯 대가 다시 올거다.....>

 

더운 여름 길목에서 매화산인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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