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야기

원창고개 귀저우 24굽이 고개 <Cent quatre-vingt-cinq185>

guem56 2011. 12. 7. 12:49

봄내시에서 동쪽을 보면 대룡산이 있고

대룡산 자락을 비켜가며

동남쪽으로 중앙고속도가 솟아있다

 

산세가 높아서

바로 고속도로 도입부부터 경사가 있어서

힘에 좋은 차들은 앞차에 밀려 답답함을 느낀다

 

예전에 너른내 홍천으로 빠지는 국도는 원창고개를 지나 올라갔다

굽이 굽이 과수원 사잇길의 그 아스팔트는

오랜만에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봄내 시민이라면 초입새부터 그렇고

봄내로 들어오는 홍천 원주 강릉 영월 평창 사람들이라면

춘천 다와서 멀미하기 좋게 안성맞춤이라

버스안의 비닐봉지는

 

늘 필수품이었다

 

그 꼬불꼬불한 길을 참 많이도 다녔는데

고속도로가 생길즈음

원창고개 굽이길도 사라지고 과수원도 흔적이 아련하다

 

휙 넘어가서 좋으나

추억도 고생길과 함께 사라졌다

어린 나이에 그 길을 넘어 올적엔

세상에 남보란 듯 살 거 같았으나

이젠

 

국가와 사회에 은근히 얹혀 사는 신세가 된 지라

멀리 대룡산의 잔설을 바라보노라면

애잔함보다는 씁쓸함이 승(勝)하다

 

1930년대 일본군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베이징 상하이 난징 우한

줄줄이 무너지니

 

김구선생도 충칭으로 이사가셨고

장제스의 국민군대와 중국인민의 피폐한 삶은 말이 아니었다

 

조지프 스틸웰 그는

일차대전에선 프랑스 쪽에서 전투를 하고

일본침략기에는

버마 전선과 중국남동부에서 미군을 지휘했다

 

고립된 충칭엔

중인(China India)공로 이 길을 스틸웰 길이라고도 부른다

 

외줄기 구명줄로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식량 각종 물품이 운반되었다

 

진창길 흙길 고개길

열악한 도로지만 살기 위해서 엄청난 물량이 버마를 거쳐

쿤밍으로 갔고

다시 귀저우를 지나 충칭으로 가야 했다

 

오늘날 인구 2천만이 산다는 충칭은 가히 전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확장세를 보이는

풍선으로 활력이 넘치나

1940년 초 충칭은 암울하고 피폐했다

사람은 많고

전황은 가혹했으며 희망은 엷어보였다

 

그런데 중국인민은 결사 항전을 했고

그 병참줄은 귀저우 칭룽현 24고개길을 넘어야 했다

 

오늘날 중국 동남에서 티벳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귀저우를 관통한다

이제 스무굽이가 넘는 그

중국판 원창고개 말티고개는

카레이서들이 경연을 펼치는 장소가 되었고

여전히 남아서

 

고단했고 비참했던

전쟁의 상황을 말없이 증언하고

이미 90줄에 넘어선 노인들이 아직도 살아남으셔서

수시로 트럭이 뒤집어지는 그 길을 넘었던 옛날을 증언한다

 

스틸웰장군은 여기서 워낙 사고가 많이 나니

1880명의 미국 공병대를 파견하여 그 길을 고쳤고

미군들이 머물던 막사자리가 안즉 남아있다

 

역사란 늘 무늬가 다채롭다

미군이 도와줘서 중국은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그 5,6년 뒤

 

압록강엔 항미원조의 길과 다리가  열리고

중공군은 미군과 한국군과 싸우러 얄루를 넘는다

 

백제 고구려가 대립하던 삼국시대

그 천년이 훨씬 지나

지금 대한민국 헌법은 한나라를 규정하고 있으나

우리는 38선이북을 맘대로 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