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완원 진화성 김정희

guem56 2012. 6. 5. 12:13

요즘은 중고등학교에서 국사도 선택과목이 되어

힘들여 배우는 학생이 적은데 세계사는 더 변두리 과목이 되었다

 

넓은 교보문고 매장에 가도 세계사 참고서 찾기가 힘들다

옛날 고등학교에선 세계사를 일주일에 한시간 배웠다

세계사 교과서엔 아편전쟁이 나오고

영국함선이 포격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실려있다

 

병인양요나 신미양요에서 강화도의 조선군이 무너지는 모습과 병치되어

기분이 좋지는 않다

 

추사 김정희가 북경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 때가 1809년 1810년 겨울이다

 

추사는 두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를 더 열심히 했고

30년 세월이 흘러 다시 한번 북경에 갈 기회를 잡았으나

곧바로 옥사에 걸려 제주로 귀양길을 가는 신세가 되었다

 

먼 남해에서 고독을 달래며 추사가 그린 세한도를

이상적이 가져간 때는 1844년45년 겨울이다

 

청나라 여러학자의 발문이 달려서 중국과 조선과 일본을 거쳐 세한도는 오랜 여행을 했다

원 그림은 작은데 붙은 발문이 몇 미터를 이룬다

 

영국은 중국의 차를 가져 가느라 은을 보내야 했고 무역적자가 계속되니

중국에 아편을 풀었다

 

임칙서가 이를 단속하자 아편전쟁이 일어났고

1842년 6월 영국함대는 상해의 양쯔강으로 들어가서 남경으로 향했다

이때 오송(吳淞)의 길목에 청나라 포대가 있었고 진화성(陳化成 1776~1842)이 이를 지휘했다

 

대포 사거리가 짧은 중국군은 금세 열세로 몰렸고 동쪽 포대는 화의를 구하며 도망갔으나

진화성의 서포대는 결사항전했고 6일을 싸우면서 영국군에 큰 타격을 주고 진화성은 총탄에 산화했다

 

청나라 정부는 시호를 내리고 지식인들은 그 충절을 기려

<진충민공유상시권>이란 시권을 남겼다 수십명의 문인들이 시를 적어 놓은 그 시권의

머릿글자는 완원이 85세된 1848년 죽기 바로 전해

아직 추사가 제주에 있었을 때인지 그때 적은 필적이다

 

추사는 1849년 정월에 서울에 도착했다

 

중국티브이에서 언뜻 보여주는 완원의 글씨는 북비의 기풍이 완연하다고

해설자가 말했다

 

저 시권은 푸젠성 샤먼도서관에 있으며 완원의 유적은 양저우에 남아있다

 

추사를 알려면 숱한 산맥을 타야 하나

등석여 옹방강 완원의 학문과 글씨 행적을 우선 살펴야 하는데

중국에서 나온 서첩의 발에 보면 여기저기 옹방강의 필적이 발문에 있다

 

서산에 해는 매일 지고

저녁이 되면 술한잔을 찾기가 쉽지 책을 뒤적이지는 않는다

묵연은 팔자가 있고

영민함과 끈기를 갖춰야 함에 

 

월드컵을 시청할 뿐

함부로 축구화 신고 잔디밭위로 뛰어들 일이 아닌듯해서 중생은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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