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리 이야기

장개석 고향 시코우(溪口).... 봉하마을

guem56 2012. 9. 27. 13:02

 가수 조미미가

<바다가 육지라면>노래를 부르던 때

신작로에 코스모스향이 진하던 때

 

 이규방 선생님은 해가 저물면 술한잔에 얼굴이 불콰하셨는데

이 분이 가끔씩 하시는 말씀이

 

....그때 맥아더가 만주를 폭격하고 장개석군대가 밀고 올라왔으면

통일도 되고 다 끝나는건데....

 

나이 열 살쯤이라

맥아더도 장개석도 누군지 몰랐고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유치리를 떠나

홍천읍에 나가 살적에

 

호국사 아래 학다리 아래

중국집 아서원이 있었는데

 

현관 유리문 너머로

두 사람의 사진이 나란히 걸렸는데

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그 왼편에 수염이 허옇고

가슴엔 훈장을 주렁주렁 걸친 할아버지 한분이 늘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셨는데

세월이 한참 지나서 그 사진 속 인물이 장개석임을 알았다

 

 중국 저장성 펑화현 시코우전(鷄口鎭)

여기가 장개석의 고향이고

평소 죽으면 고향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1949년 4월 말쯤에

그는 샨강(剡江)에서 뗏목을 타고

시코우 설두산을 영원히 떠났다

 

 49년 4월 23일

마오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은 남경에 진주했다

 

장개석은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타이완으로 갔으며 오월에 해방군은 펑화에 진주했고

 

마오는 명령을 내렸다

....장씨가문의 사당과 장개석의 별서와 주거지를 보전하라...

 

오늘날

소금장사를 해서 부를 이룬 장씨가문의 유적은 온전하고

해마다 타이완에서 장개석을 기리는 후손들이 참배하러 온다..

 

 장개석의 첫부인은 마오 푸메이(毛 福梅)

첫부인의 아들이 훗날 타이완 총통자리를 이어받은 장경국이다

 

마오부인은 장개석이 송미령과 네 번째 결혼을 하면서 이혼을 요청하자

현주거지에 살게 해달라는 요구만을 했다고 한다

 

청단(겉보기엔 한국의 송편)같은 떡을 잘 만들었는데

한마을 이웃거주지에 장개석과 송미령이 머물면

늦잠이 습관인 송미령 모르게 장개석이 이른 아침 빠져 나와

마오부인이 만든 청단을 옛집에 와서 먹고 갔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장개석은 공과가 많은 인물이다 평자에 따라 과(過)부분이 더 무겁다고 한다

1910년 전후 몇 년간 장개석은 일본에 있었고

일본군대의 일원으로 복무한 듯 하다

 

그때는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완전히 합병한 때이고

아마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척살할 때

 

장개석은 일본에서 군사학을 배우고

일본군인으로 지냈으니

역사는 두고 두고 살펴야 한다

 

 마오쩌뚱의 실제 명령에 의해

장개석이 머물던 설두산(雪竇山)묘고대(妙高臺)가

오늘날 온전한지 모르나,

패장의 유적을 보전한 대인배들의 마음넉넉함은 본받을 만하다

 

경남 진영의 봉하마을을 마을 모습은 예전과 같되

촌장 노무현은 속절없이 떠나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