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야기

정일영뎐(傳) 둘

guem56 2012. 11. 6. 12:05

임진년

저물어가는 시월 금요일날

 

병원 3층은 수술실이었고

정박사는 거기서 10년 세월을 보냈다

 

휠체어에 타고서

사뭇 밖으로 나가고자 하니

수술실 안의 <내 방>에 가고 싶은 생각이었으나

새건물의 복도를 돌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야 해서

 

그냥 입원실로 돌아왔다

 

가을빗방울이 내릴 듯한 저녁

밖은 어두웠고 동서남북 병동들의

형광등이 어른거릴뿐이나

창이 블라인드에 가린 입원실 보다는

 

내다보는 경치가 나은지

정박사는 오래 오래 여기 저기 밖을 내다 보았다

 

사람이 아프면

움직임이 힘들어 동선을 잃어버리고

병이 더 깊어지면

시선을 둘 데도 묶이는구나

 

깊은 허무함이

시베리아 기단처럼

서늘하게 갑작스럽게 파고든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의

시구에 이런 말이 있다

 

 

春蠶到死絲方盡 (춘잠도사사방진)

蠟炬成灰淚始乾 (랍거성회루시건)

봄누에가 죽을 때가 되면

몸속의 실이 다하고

촛불이 재가 되면

비로소 촛물이 마른다

 

더러 이 시구는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 하여 썼다고 하지만

 

달리 보면

평생을 애써 무언가를 한 사람이

기운이 다하여 생이 마감할 때를 비유한다고도 볼 수 있다

 

삼일이 지난 월요일 저녁

밤이 가고 이튿날 새벽이 되어

 

당시 삼백수

마침 펼친 곳에 이상은의 저 시구가 있었다

 

쌀쌀한 아침에

하필이면 이 시인가

아무 생각없이 밥때가 지나고

열시쯤 되었을 때

 

저혼자 어딘가 있던

핸드폰에는 문자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정일영은

화요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볼록렌즈와 오목렌즈 촛점위치를

못 외우면

싸리가지로 손바닥을 맞던 과학시간

그때가 1973년이었고

임진년에 떠났으니

 

40년 인연이 마감이 되었다

 

그는 물리를 잘했으나

의학을 공부했으며

서울 원자력 병원에 있다가

고향 춘천의 강원대학 병원에 와서

낮에는 일에 파묻혀 살고

날이 저물면 소주를 마시다가

저하늘로 갔다

 

10년을 더 살았다면

애석함이 덜 할까만

 

산 사람의 마음이야

오늘은 스산해도

 

먹고 사는 일에 묻혀

아카시아 꽃이 피고 지면

희미해진다던데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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