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견

황정견 정풍파(定風波)

guem56 2012. 12. 14. 11:23

 

定風波(황산곡이 검주에서 지은 詞)

 

 

 

萬里黔中一漏天

만리 먼먼 귀주땅

하루종일 비오니

 

 

 

居屋終日似乘船

及至重陽天也霽

집안에 있음이 배를 탄듯 하네

중양절 되어서야 하늘이 맑아졌네

 

 

催醉

鬼門關近蜀江前

귀문관 가까운 촉강에서

실컷 취했으니

 

 

莫笑老翁猶氣岸

노인이 기세는 살아있다고 웃지 말게나

 

 

君看

幾人白髮上華顚

머리위에 백발

몇 사람이나 보았는가

 

 

 

戱馬臺

前追兩謝

내가 희마대에 있었더라면

사령운 사첨(謝瞻) 두시인처럼 글을 지었을 것이고

 

 

馳射

風情猶拍古人肩

 

말타고 활울 쏘니

마음은 옛사람에게 뒤지지 않을 걸세

 

 

***

귀문관: 쓰촨성 펑제현에서 가까운 협곡

기안(氣岸):이태백 시구에 나오는 구절로  기세가 호방함을 말한다

희마대: 장쑤성 쉬저우(옛날 초패왕 항우의 근거였던 팽성지방)에 있던 말훈련장소로 항우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양사:동진시대 사령운과 사첨의 두 시인을 가리킨다

 

 

 황정견은 소식을 스승으로 선배로 모셨다

1085년 송나라 신종이 서거했고 그의 아들 철종이 들어섰으나

불과 10세라

신종의 어머니이자 철종의 할머니인 고태후가 섭정을 했다

 

고태후는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사마광을 중용하고 소식 소철형제도 송나라 조정 개봉에 돌아와

현실정치에 참여했다. 1

 

093년 고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철종의 시대가 왔는데

철종은 부왕 신종이

취했던 개혁정책으로 돌아섰고

소식 소철 형제는 귀양을 떠나게 되었으며

 

같은 당으로 몰린 황정견은

멀리 검주(黔州 지금의 귀저우)로 갔는데

여기는 장강 삼협과 백제성이 가까운 사천 근처 귀저우 땅이었고

 

정풍파는

비가 몹시 내리던 여름에 누추한 집에서 고생한 정황을 담담하게 노래한 것이다

 

일찍이 소동파가 황주에서

단련부사라는 한직으로 많은 식솔들과 함께 먹고 사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비가 와서 물이 들이닥친 부엌을 읊은 한식시첩과 내용이 비슷하다

 

황정견은 평생 스승이자 선배인 소동파를 존경하고

그 아우 소철과도 한묵의 연을 이어가며

이리저리 옮겨다닌 귀양지에서 늘 스승을 그리워했다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임진년 겨울

대선을 한 주 앞둔 지금은 소동파가 한식시첩을 쓴지 930년이 지난 무렵이고

이 정풍파는 1090년대 중반에 나온 작품인데

 

 

하필이면 이 시대에

이웃나라 사람들의 시문을 읽을까만은

 

북송시대 개혁을 둘러싸고

당송팔대가와 그 문인들의 얽히고 설킨 사정은

 

1920년대 소비예트 상황이나

1930년대 미국 그리고

노무현과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한국정황과도 큰 얼개가 비슷한 면이 있다

 

소동파와 황정견의 관로 생활을 차치하고

그들의 서화를 살펴보고 정감어린 시사(詩詞)를 읽다보면

 

정조 이산과 다산이나 추사가

책상위에 왜 그들의 책을 늘 두고 읽었는지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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