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조

미우인 이청조

guem56 2013. 5. 20. 16:28

 미불의 초계시첩이나 촉소첩을 보면

글씨도 어렵고 시는 더 어렵다

 

다만 자꾸 보면 좋은거 같아 펼쳐보고 또 보게 된다

타이완 고궁박물원에 있다는 비단위의 글씨 촉소첩은 초계시첩과 함께

1088년 탄생했으니 미불의 아들 미우인(1074~1153)은 이미 10대의 소년이었다

 

1101년 여름

해남에서 풀려난

소동파는 양자강을 따라 동북상하여 진주(眞州)에 있었고

서거 한달전에 미불을 만났다

 

이미 소동파는 병이 깊어 인삼과 맥문동을 달여 먹었으나

병은 심해졌고 강을 강너

상주로 가서 임종했다.

 

시서화 삼절의 두 사람은 이렇게 동파가 죽기 전에 만나 차세의 연을 마감했다

소동파가 미불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구소서간에 전하는 미불에게 보내는 서신을 보면 알수 있다

 

북송 휘종시대

서화에 깊이 빠진 휘종은

국고가 탕진 되는 줄 모르고 더구나 외침은 대비를 안했다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킨

신흥 여진의 금나라는 송나라 개봉으로 군대를 보냈다

 

금나라의 침입으로 북송이 망하고

휘종의 아들 조구가 항저우 근처로 와서 남송을 열었다

 

이청조는 산동 청주에 살다가 남으로 이주하여 파란만장한 날을 보냈다

 

이청조의 부친 이격비(李格非)는 소동파 문하의 후사학사로 알려져 있다

 

1149년

66세의 이청조는

75세의 미우인을 찾아갔다

 

<영봉행기첩 靈峰行記帖>과 <수시재사첩 壽時宰詞帖>

생전에 미불이 쓴 서첩을 피난길에 수장해온 이청조는

그 아들에게서 발문을 청했고

수십년만에 부친의 글씨를 본 미우인은 기꺼이 제발을 써주었다

 

저 글씨가 전해져 오는지 혹은 모본이라도 있는지 아직 모르겠다

이청조의 일생을 보면 40대 후반부터 피난길의 고통속에서 갖은 곡절이 이어진다

 

그 와중에서 청조는 절절한 송사를 토해냈으며

조명성과 함께 모아둔 서화를 많이 잃었으나

어떤 목록은 잘 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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