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man

북송 휘종 재상 장돈

guem56 2015. 12. 23. 16:22

사마광과 왕안석은 젊어서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내다

신종이 즉위한 2년후 1069년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면서 정적이 된다

 

왕안석의 신법은 상당히 합리적인 면이 많았으나

급작스럽게 실시 되었고

 

이로 인해 금전상의 손해를 보는 계층이 생겨났으며

아래 백성들에게 실제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변형이 많이 되어

원성을 사는 부분도 많았다

 

신법을 주장하고 실행하자는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구법파는

화해와 조정의 길을 걷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반목하게 되었다

 

1093년 신종의 어머니 고태후가 별세했다

신법을 적극적으로 펴던 신종이 별세하고

그 여섯째 아들 철종이 즉위한 해는 1985년

철종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따라서 이때는 할머니 되는 고태후가 수렴첨정을 했다

고태후는 아들 신종과 달리

사마광 소동파의 구법파를 지원해서

 

대거 한직에 있거나 유배 중의 인물들이

수도인 카이펑으로 들어오고

마치 조선 숙종때 남인과 서인들이 정권을 바꾸는 듯한 양상이

발생했다

 

그런데 할머니 고태후가 별세하자

친정을 하게 된 철종은 아버지 신종의 신법을 추진하게 되었고

다시 장돈 증포등의 신법찬성자들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철종은 1100년 일찍 서거했다

후사가 없었기에

그 다음 황위는 철종의 동생들 중에서 나와야 했다

 

이때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사람은

 재상 장돈(章惇 1035~1105)이었고

황실의 어른은 신종의 비인 향태후였다

 

원래 철종의 친모인 주태후도 있었으나

향태후가 덕망이 높고 서열상 위여서

대궐에서 발언권이 있었다

 

신종은 아들이 열넷이었으나

단명자가 많아 철종 사후 황제가 될 후보자는 네명뿐이었다

 

재상 장돈은 주태후의 아들 조사를 황제로 내심 생각했으나

향태후의 마음은

서화를 잘하고 영특한 11번째 아들 단왕 조길에게 기울었다

 

이때 장돈은

端王輕佻 不可以君天下(단왕 조길은 성품이 가벼워 황제로선 불가하다)란 말을

남기며 극력 반대했으나 세에 밀려났다

 

장돈은 이후 철종 장례를 책임지는 산릉역을 했는데

철종 운구시에 비가 몹시 온날이 있었다

 

상여꾼들이 진흙속에서 갈 수 없어 유숙을 청했고 장돈은 이를 허락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를 시비하여 황제의 유구를 진흙밭위에 놓았다고 탄핵했고

장돈은 먼 남쪽 뇌주로 귀양을 떠나면서 몰락했다

 

장돈은 차갑고 매몰차며 계략에 밝았으나 최소한

국격을 높이겠다는 애국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행정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장돈 실각후에 줄줄이 재상이 나왔으나

하나같이 간계에 밝고 탐욕과

무능이 넘치는 부류였으니 휘종이 그들에게 휘둘렸고

이 또한 휘종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휘종의 등극을 극력 반대한 그의 눈은 밝았다고 볼 수 있다

장돈은 젊은 시절 소동파와 친우였으나 나중엔 정적으로 되어 소동파가

보다 험한 유배지에서 고생하도록 한 인물이다

 

역사를 보면 사람들 사이에 애증이 변하는 과정을 참 많이 보게 된다

 

휘종은 즉위하고 나서 2년간 언로를 열고 인사를 공정하게 했으며

여러 가지 참신한 개혁안을 내어서 안정과 번영의 서광이 비쳤다

 

휘종은 1125년까지 25년 황제자리에 있으면서

북송의 기틀을 하나 하나 갉아먹어서 결국 망국의 결과를 초래했고

휘종 자신도 춥고 황량한 동북 만주로 끌려가 비참하게 죽어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북송과 휘종의 몰락엔 뼈아픈 교훈이 워낙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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