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종은 즉위초 2년여
언로를 열고 여러 방면에 개혁을 해서
북송에 언뜻 국운 융성의 기운이 서렸으나
이내 나라가 점점
이상한 분위기로 흘러갔으니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휘종의 취미생활이다
글씨면 글씨 그림이면 그림
예술창작에 높은 경지에 이른 휘종은
돌과 화초를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강소성 태호 근처에서 많은 돌을 가져왔다
돌은 무게와 크기가 문제였다
사방 몇 미터 되는 돌을 천리길 이상 운반했으니
그 돌의 수송을 위해 운하를 정비하고
특수한 운반선을 제작했으며
지방의 성문을 지날 때 문이 좁으면 성채를 부수는 일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무려 10만점 이상의 크고 작은 돌을 채집해서 가져오다 보니
백성들이 돌을 함부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고
민간에 있는 기이한 돌들을
수령방백이 다투어 강탈하다시피 했으며
이를 역시 수송하느라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다
휘종은 도교를 믿었는데
청담과 한적의 수양하는 도교가 아니라
주술을 통해
여러 후손을 낳고 국기를 튼튼히 한다는 사술에 빠졌다
엉터리 도사들의 말에 현혹되어
카이펑 동북쪽에 기암괴석을 세우고
여러 가지 기이한 동물과
식물을 모아서 정원을 꾸몄다
동북쪽을 간(艮)방이라 하여 이 원림을 간림이라 칭했는데
기이한 남방의 기린 공작 같은 동물들이 숲속에서 노닐고
안개 운무가 피어올라 신선이 사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고
휘종은 여기서 산책을 즐겼다
국방과 내치도 아닌
이런 황제의 취미생활에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날 지경이고
결국 민초들에겐 가혹한 세금이 부과되어
방랍의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나중에 금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원림은 순식간에 파괴되었고
거기 모아 두었던 기암괴석은 금나라 황제가 베이징으로 옮겨
오늘날
북경의 여러 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돌은 썩지 않으니 천년전 그대로일 것이며
사연을 모르는 시민들은 좋은 경치를 지금도 즐길 뿐이다
예술가 휘종이
그저 강포한 금나라 군대에게 침입을 당하여
순진하게 망국의 화를 당한게 아니고
스스로 썩을 대로 썩은 끝에 망하게 되었으니
춥고 음산한 동북방으로 끌려가서 죽게 된
휘종의 만년의 팔자는 동정을 받을 여지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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