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man

미스터 증공

guem56 2020. 6. 12. 15:39

증공은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이다

 

북송시절에 과거는 3년에 한 번 치렀다고 하거니와

증공은 첫 시험 본 지 21년만에 합격을 해서

늦게 벼슬에 나갔으니 높은 관직엔 오르지 못했으나

문장이 단아하고 선비의 풍모가 있어 문명은 드높았다

 

과거를 왜 늦게 되었는가는

집안이 워낙 가난해서

식솔들 살림살이를 해결하느라

시험을 제 때 볼 수 없었고

맘편하게 시험공부에 매진할 수 없어서

 

처음 시험에 떨어지고 고향에 가서 많은 형제들과

가족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느라

21년동안 시험은 3번을 치렀다고 한다

 

일찍이 수도인 카이펑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문장이 이름이 나서 구양수를 스승으로 모셨고

같은 시기 공부하는 와중에

왕안석과 친교를 맺었고 왕안석은 22살에 과거에 합격을 했다

 

왕안석과는 주욱 편지를 주고받으며 절친으로 지냈는데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왕안석을

평민 신분인 증공이 구양수에게 추천을 하여

왕안석이 서울 벼슬살이에 입성하도록 했고

 

장차 19세의 젊은 신종이 즉위했을 때

왕안석의 신법 개혁이 가능하도록 말하자면

길을 연 역할을 증공이 했던 셈이다

 

인생은 무상하고

삶의 행로는 워낙 다양해서 그토록 친했던 두 사람은

개혁 신법에 관한 의견차이로 서로 왕래를 끊게 된다

 

나중에 왕안석의 학식과 경륜에 감탄했던 구양수도

왕안석과는 의리를 끊게 되고

 

또한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과도 왕안석은 등지게 된다

 

왕안석의 신법개혁으로 송나라 정국은

개혁파와 수구파로 갈라져

수십년 대립이 계속된다

 

여기에 관한 사연은 워낙 길고 길어서

오늘날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아무튼 증공은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서

8인 중에 요즘 말로 하면 조회 수가 제일 떨어지는 사람이나

글의 기품과 단아함에선 가장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가 지은 글 중에

유명한 서예가 안진경과 관련된 글이 있다

 

원나라에 선우추(鮮于樞 1246~1302)는 글씨를 잘 썼다

송설체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조맹부는 늘

자신의 글씨는 선우추만 못하다 하였다

 

일찍이 천하행서3품을 선우추가 정한 바

왕희지 난정서가 제 1이요

소동파 한식시첩이 세 번째다

그럼 두 번째 행서는 누구의 어떤 글씨인가

 

한국에 현재 서예인구는 무척 많다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 안진경의 다보탑비나 안근례비를 교재로 삼아 따라 쓴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진경의 조카 안계명이

반군과 싸우다가 항복을 거부하고 피살되었다

이를 전해듣고 비통에 잠긴 안진경이 쓴 글씨가

조카를 제사지낸다는 제질문고(祭姪文稿)라는 글이며

 

이 글씨가 천하제 2행서이다

 

안진경(709~785)은 시성 두보와 거의 같은 시기 사람이다

 

안진경이 75세 무렵 회서절도사 이희열이 반란을 일으켰다

절도사의 반란 소식에 당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던

덕종황제에게 재상 노기가 아이디어를 냈다

 

만고충신이며 인덕이 있는 안진경을 보내

이희열을 설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실상 노기는 안진경을 시기하여

사지로 내몬 것이었고 황제의 명이라는 구실을 알면서도

 

반란군에 들어간 안진경은 적진에 인질격으로 잡혀있다가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후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용맹함과 덕을 기렸다

 

안진경이 과거 무주자사를 지낸 경력이 있는지라

1056

무주 관리들이 안진경의 덕을 기려

안진경의 사당을 짓고 그 상량문을

증공에게 부탁을 했다

 

무주안노공사당기(撫州顔魯公祠堂記)

오늘날 증공 문집에

간략하고 품격있는 문장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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