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북송시대 2

guem56 2018. 12. 27. 18:24

중학교 2학년 가을에 읽은 국어교과서의 내용이라고 기억한다

필자는 이희승 박사였고 수필제목은 淸秋數題(청추수제)인데

거기 서중자유천종록(書中自有千鍾祿)이란 말이 인용되었다

 

송나라 진종 황제 권학문의 구절이라고 참고서엔 적혀 있었다

 

진종은 책읽기를 권장해서

책 속엔 엄청난 재화와 보물이 들어있으니 부지런하게 독서하란 내용이다

 

진종 재위시에 송나라 북쪽엔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있었다

요나라는 고려를 부단히 침입했으며 송나라에도 역시 전쟁을 걸어왔다

 

거란은 고려에 10101018년 대규모 군사를 투입했다

1018년 거란 3차 침입때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을 이끌었다

 

거란이 고려와 큰 전쟁을 벌인 수 있던 배경에는 송나라와 전쟁을 방지하는 화의를 맺었기

때문이다

 

1005년 송나라 진종은 현재 하북성 푸양현에서 남침한 요나라와 전연의 맹이란

평화조약을 전쟁종결을 목적으로 맺었다

 

송나라는 비단 20만필 은 10만냥을 매년 요에 보내기로 했으니

이는 평화에 대한 보상금이다

요에서 보면 송이 바치는 공물이고

송에서 보면 요에 내리는 하사품이라 할 수 있으나

죽어나는 건 송나라 백성들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송나라는 서쪽의 서하와도 평화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대개 패하는 허약한 송나라로선 돈으로 거친 상대를 달래는 격이었다

 

세월이 흘러 송나라 신종이 임금이 되었다

20대의 젊은 신종은 재정이 바닥난 송나라 국고를 보고

또한 해마다 막대한 전쟁방지 배상금 형식을 재화를 요와 서하에 뜯기는 현실을 목도하고

부국강병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래서 이런 꿈을 실현할 인재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장방평(張方平)이 해결사로 떠올랐다

 

장방평은 예전에 사천성에서 벼슬을 할 때 소식(소동파) 소철 형제를 돌봐준 인물인데

학식과 인덕을 겸비한데다 무엇보다 지방 재정 수익을 탁월하게 올린 업적이 있었다

요즘말로 하면 경제장관으로 제격이었고 신종은 정치와 행정 경제 다방면에 경험많은 장방평을 재상으로 중용하려고 했다

 

이때 사마광이 극력 장방평의 중용을 반대했다

 

매사 원칙과 도덕성이 강한 사마광은

장방평이 노회해서 능력은 탁월해도

청렴하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었고

한번 반대의견을 내면 좀처럼 수정을 모르는 사마광의 강력한 주장이 주요인으로 작용한데다

장방평의 가내 사정으로 벼슬 할 처지도 안되다 보니

장방평은 밀려났다

 

이런 상황에서 왕안석이 등장했다

원래 왕안석은 타고난 문재와 경륜으로 수도 카이펑에 인재로 소문이 났으나

수도에서 관리생활을 안하고 지방으로 떠돌았다

 

예나 지금이나 출세를 하려면 서울에서 중앙관서에 근무를 해야 하는데

사적으로 월급이외엔 출장비 일원도 주머니에 챙기는 습관이 없는 왕안석은

부양해야할 직계가족과 가까운 인척이 많아서 월급이 높은 지방관을 전전했다는 설이 있다

 

1884년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땅에서 일본군에 쫓겨난 위안스카이는 타고난 순발력으로

북경에 가서도 군권을 유지했고 서태후에 줄을 서서 무술정변때

캉유웨이나 량치차오(양계초)를 역적으로 만들었다

 

양계초는 북송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 역사 3천년에 가장 위대한 개혁가로 왕안석을

꼽았다

 

그러나

송나라 신종의 손자로 금나라에 패하여 남쪽으로 밀려가 항저우에 남송을 세운

남송 고종은 북송 멸망의 원인을 신종 당시 신법 정책 실행과 실패

그리고 그 주동자로 왕안석을 지목했다

 

현재 남한 정국은 여러 가지 경제정책에서 적폐를 청산하고 각종 개혁정책을 실시 중이다

소득주도성장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정책이 성공과 실패의 어떤 성적표를 받을지는

불과 1,2년에 결정이 될 것이다

 

나는 지금의 판세를 보고 결과를 예측할 능력이 없으며 잘못 뭔가 말했다가

댓글에 올라오는 엄청난 압력을 이겨낼 가슴패기가 읎다

 

다만 겨울밤 잠이 안오다 보니

지금부터 900~1000여년 전에 있었던 북송의 개혁정책

그리고 실패와 망국의 과정을 한 번 나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이런 북송의 망국과정은 사실 내 관심사라기 보다는

조선시대 숱한 왕과 신하들의 경연장에서 1급의 토론 주제였다

 

생각해보니 사마광과 왕안석은 같은 시대에 둘 이 공존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사마광은 무엇보다 장방평의 등장을 막은 것이

작다면 작은 이 사건이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너무나 잘못한 것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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