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북송 4

guem56 2018. 12. 29. 16:30

사마천은 한나라 무제 때 태사령 벼슬을 살면서 역사 편찬을 하는 사람이었다

기원전 99년 동향 친구 이릉이 보병 5천명으로 흉노의 땅에 깊숙이 들어갔다

구원군 없이 수만의 기병대와 한편 싸우면서 한편 후퇴하다 불가항력으로 잡히게 되었다

 

장안에선 이릉을 역적으로 몰고 그 가족들을 처형하였다

이때 사마천은 친구 이릉의 구명을 위해 한무제에게 죄를 가벼이 해달라 간언을 올렸고

불같은 성격의 한무제 심기를 건드려 사형을 당할 처지에 이르렀다

 

돈이란 예나 지금이나 힘이 있어서 많은 돈을 내면 사면이 될 수 있으나 돈은 없었고

사형대신 궁형을 택하여 살아남았다

 

사마천은 방대한 역사서 <사기>를 완성했다

 

이릉의 군대가 얼마나 군기가 삼엄하고 얼마나 잘 싸웠으며

이릉이 얼마나 한을 품고 흉노의 땅에서 살았는지

그 사정은 고문관지에 전하는 <이릉답소무서>에 전한다

 

사람이 울분에 차고 동서남북 아무도 도와 주는 이가 없을 때 읽으면

자살을 면할 만한 명문이다

 

사마천은 스스로 어떻게 궁형을 당할 처지에 놓였으며 형벌을 받은 이후

어떻게 사기를 완성하게 되었는지 절절한 심경을

역시 고문관지에 전하는 <보임소경서>에 적어 놓았다

 

장려한 문장 마지막 구절에 이런 구절이 있다

<死日然後是非乃定 사일연후시비내정>

사람은 죽고 난 뒤라야 생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삶의 과정의 옳고 그름이 가려진다는

뜻이다

 

이는 사마천이 자신의 불우했던 운명을 스스로 다독거리면서

현세의 굴욕을 참고 사후라도 역사는 사마천의 일생을 편들어 줄거라는 믿음에서

지어낸 글구이다

 

아무튼 사마천은 사기를 짓고 난후 언제 어디서 별세했는지 자세하지 않다

서기 310년 사마천 서거 400년이 안될 무렵

 

한양태수 은제(殷濟)가 사마천을 존숭하고 그를 기리는 아무 흔적이 없음을 안타까와 하여

지금의 산시(陝西)성 웨이난 한청시 즈촨전에 사당을 세웠다

여기는 사마천 고향인 룽먼전 근처로 사마천의 사당은 황하를 지척에 바라보는 언덕에 있다

 

역대 황제들이 가꾸고 돌보아 오늘날도 사마천의 사당은 규모도 있고 잘 보존되어 있다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와서 만났다는 쿠빌라이 황제가 사마천의 사당 안 무덤을 개축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무덤 양식이 둥그런 원통형의 몽골방식이라 한다

 

북송의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장장 19년에 걸쳐 완성하고 나서 눈이 잘 안보이고 이가 다 빠졌다 (目視昏近 齒牙無機)고 적으면서 다만 이 책을 후대 제왕들이 보고

교훈을 삼아 선정을 베풀고 선비와 백성들이 책읽는 즐거움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밝혔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에 찬성하질 않았다

신종은 사마광에게 추밀부사직을 내리며 조정에 남아 있을 것을 간청했으나

사마광은 신법이 실시되는 한 저는 떠납니다 하여 낙양으로 가고

향후 15년 신종이 죽을 때까지 개봉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정치는 정치이고 역사책 서술은 또 다른 일이라 신종은 자치통감 완성을 위한 조치를 철회하지 않았고 죽기 전에 자치통감을 만났다

 

1085년 신종이 서거하자 신종의 어머니 고씨 태황태후는 손자 철종을 황제로 세우고 나이 어린 손자를 대신하여 1093년까지 수렴첨정을 했다

 

교양과 학식을 겸비한 고씨 태후는 아들과는 달리 왕안석과 신법에 몹시 반대했다

시어머니 즉 신종의 할머니 조 태후 또한 그러하여 신종은 수시로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신법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고씨 태후는 아들이 죽자 급하게 밀사를 보내 사마광을 불러 들이고

몇 달 뒤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다는 사마광을 재상자리에 앉혔다

고씨 태후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사마광은 전면적인 신법 폐지에 나섰다

 

소동파(소식)는 사마광 왕안석 보다 1816년쯤 나이가 어리다

동생 소철과 함께 동시에 과거에 등단하고 문재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다

시나 문학 뿐 아니라 논변에 당할 자가 없었다

 

사마광은 소동파를 신종임금에게 간관으로 천거했는데 왕안석이 음으로 양으로 극력반대하여

소동파는 외직으로 밀리고 그래서 항저우로 갔으며

항저우 서호에 오늘날도 전하는 수해방지용 둑인 소제를 쌓았다

 

일설에는 똑똑한 소식을 매사 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임무인 간관으로 만들면

신법의 폐단을 조목조목 지적할 것이라 왕안석이 소식을 멀리 내쳤다고 전한다

 

아무튼 소식은 사마광이 신법을 전면 폐지하고 완전히 180도 정책을 펼치려 하자

신법에 좋은 것도 많고 갑자기 확 바꾸면 대 혼란이 일어나므로 신중하게

노선을 결정하고 서서히 이행해야 한다고 사마광을 붙들고 간청을 했으나

아마도 사흘낮 사흘밤을 새웠을 게다

간청을 했으나.... 했으나.......

 

인간은 심리적 동물이다

한때 죽자 살자 했던 친구요 시문을 주고 받고 말술을 마시던 왕안석인데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는지 아니면 이미 66세 노인의 고집인지

사마광은 처절하게 왕안석이 시행한 것들을 사사삭 지워버렸다

 

사마광은 집권 1년반쯤에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왕안석은 백성들에게 별로 지지율이 높지 않았는데

사마광은 일반 백성들에게 당시 갤럽이나 리얼미터 거의 90프로를 자랑했던 모양이다

그가 죽자 상인들은 철시하고 일반 백성 수만이 장지로 가는 행렬에 몰렸으며

민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집도 있었다 한다

 

사마광은 높은 인품과 백성들을 아낀다는 애민정신의 소유자로 평이 나서 그렇다고 한다

 

사마광의 사당은 오늘날

산시(山西)성 샤()현에 잘 모셔져 있다

 

]사마천의 사당이 황하 서쪽에 있다면 사마광의 사당은 황하 동쪽에 있고 그 거리 또한

넓은 땅 중국이라 치면 멀지 않다

 

쌀말이라 있으면 팔아서 그런데 한 번 가서

시라도 한 수 지을 마음은 있으나 시절이 잘못 만났는지

오늘도 방콕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포만지락에 취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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