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북송 5

guem56 2018. 12. 30. 18:52

193712월 추운 겨울

이듬해 정월달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군이건 민간인이건

한달 보름여 무차별 학살을 했다

일본에선 약간의 불상사 일뿐이라고 부정하지만 중국에선 난징 대학살 대도살이라 부른다

그 끔찍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남경(난징)은 양자강 가에 위치하였으며 역대 여러 왕조가 여기를 수도로 삼았다

 

1037년 왕안석의 부친 왕익(王益)이 강녕통판으로 임명되니 이는 난징 부시장급이다

열일곱 소년 왕안석은 아버지 따라 난징에 살고 여기가 말하자면 제 2의 고향이 되고

왕안석은 나중에 은퇴해서도 강녕(난징) 반산에 살다가 서거했다

 

송나라 신종 스무살 무렵 왕안석이 수도 카이펑에 가서 신종을 알현하고

이듬해부터 왕안석의 거의 전권을 물려받아 전대미문의 대개혁에 착수한다

 

송신종은 소년 시절에 엄청난 독서가였으며

특히 <한비자>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

 

제자백가 중에 한비자는 법가로 통하고 한비자 책 속엔

부국강병과 제왕의 통치술이 구구절절하고 특히 제왕이 신하를 다루고

정과 사를 구별하는 법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또한 한비자의 글구는 일목요연한 대구가 많고 논변의 흐름이 정연하여

한문공부엔 그만인 교재이다

 

다만 인의와 도덕을 중시하는 유가들은 한비자를 낮게 평가하였고

조선시대 역시 그러한 풍조를 따라 한비자는 바른 선비가 열심히 읽어야 할

책은 아니었다

 

한비자를 즐겨 읽었다니 세금과 병역 그리고 시장 거래와 농업 전반에 이르기까지

자신감 있게 이런 저런 대책을 막힘없이 설파하는 왕안석은 그야말로

신종의 눈엔 제갈량 급이었다

 

왕안석은 개인적인 의리나 우정보다 그리고 과거 관료로서 경험이나 실적은 뒤로 하고

자신의 신법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실무진을 꾸리고

따라서 노선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외직으로 밀려나갔다

 

사마광이 떠났고 소식과 소철이 떠났다

문명으로 천하가 떠들썩했고 신종황제의 할아버지 인종이 소식 소철 두 형제의

과거 답안지를 들고 부인 조태후에게 오늘 국가의 백년 인재를 둘 씩이나 얻었다고

그렇게 좋아했다던데 소식 소철 두 형제는 한가한 도시의 부시장급이나 문서담당관으로

밀려났다

 

추진력 강한 왕안석의 개혁은

농민들에게 곡식을 대여해주는 청묘법 그리고 병역제도를 바꾸는 면역법등

대 여섯가지 분야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개혁은 일정부분 부작용이 있다

그 자세한 내용은 필설로 하면 책을 써야 할 지경이다

 

신종의 할머니 조태후 어머니 고태후는 수시로 신종을 찾아와 읍소하며

왕안석을 내치라 했다

그 와중에 굶주림에 지쳐 떠도는 백성을 그린 정협이란 사람의

유민도(流民圖)가 등장했다

 

더구나 하늘이 무심한지 가뭄이 해마다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074년 왕안석은 재상자리에 물러나 고향땅

남경으로 물러났다

왕안석의 1차 실각이다

 

泊船瓜州(선박과주)

 

京口瓜州一水間

鍾山只隔數重山

春風又綠江南岸

明月何時照我還

 

왕안석이 남경으로 돌아간 이듬해 봄

신종은 왕안석을 다시 재상으로 불렀다

 

남경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양자강을 따라 올라가면 양저우와

전장을 지난다

 

양저우 근처 지방을 과주라 하고 전장(진강)을 경구라 한다

 

왕안석은 종산이 있는 고향 남경에서 배를 타고 과주로 와서

배인지 항구인지 1박하며

이제 다시 수도 카이펑에 가서 신법을 시행할 처지에

약간 부풀은 감정으로 이 시를 썼다

 

거칠게 옮기면

과주와 경구는 양자강 강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었데

내 떠나온 종산은 여러 중첩된 산들 서쪽에 있다네

봄바람 불어 강언덕이 푸릇푸릇한데

저 밝은 달은 그 언젠가 내가 (뜻을 이루고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갈 때 역시 오늘밤처럼 나를 비추리라.....

 

이 시에서 춘풍(봄바람)은 다시 왕안석을 신임해서 불러 준

신종의 은택이랄 수 있고

또한 봄바람은 왕안석이 시행하는 신법을 상징하여

그 효과가 만백성(강안의 풀)에게 미치는 것이라고

역대 많은 평자들이 주석을 달았다고 전한다

 

살별(혜성)은 옛날엔 무척 안좋은 징조를 상징하였다

카이펑 하늘에 혜성이 떴다

1076년 왕안석은 완전히 실각하고

고향 남경으로 떠났고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은 채

10년 은퇴생활을 하다가 86년 별세했다

 

죽기 한해 전

황저우에서 유배가 풀린 소동파가 구강 여산에 들려

여산진면목이란 시구를 남기고

여기 남경에 들려 왕안석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두 사람이 지은 화답시가 여전히 세상에 전한다

 

 

카폐 (즐거운 방콕)에서

급히 오자 수정도 없이

비설 적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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