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북송 7

guem56 2019. 1. 1. 18:06

사람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가 세상을 뜬다

그 어울리는 사람들이 많으냐 적으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깊은 산속에 사는 자연인도 더러 사람을 만나고 산다

세상엔 의리 우정 사랑 더불어 사는 삶 이런 말들이

세밑이나 새해 초엔 유난히 떠돈다

 

그런데 무협지는 대개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진 지 십여년

이런 구절로 시작한다

 

수천억 재산을 왕창 기부해 버린 주윤발의 영웅본색은

의리를 저버린 한 때의 동료를 응징하는 내용이 줄거리다

 

누구나 한 때 몹시 가까웠던 사람과 나중에 연락이 닿지 않거나

아예 등을 돌리고 살게 된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보고

그 스스로 겪기도 한다

 

북송엔 삼사(三司)라는 관청이 있었다

염철부와 호부 탁지부로 나뉘는데

염철은 시장경제와 병기등을 다루고

호부는 가계와 세금분야이며 탁지부는 재정 회계 지출 분야로 대충 구별된다

 

우리가 요즘 흔히 쓰는 사자성어중에

와신상담 오월동주 가 있다

양자강 하류를 사이에 두고 서북의 오나라와 동남의 월나라가

죽자살자 싸운 데서 나온 고사이다

 

충신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미인 서시를 가까이 한 오왕 부차는

마침내 월왕 구천에게 나라를 내주고 죽게 된다

 

월나라 근거지는 절강성 은()현인데 오늘날 닝보시 지역이다

왕안석이 여기서 벼슬살이 할 때

식량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관가의 곡식을 풀고 가을엔 약간의 이자를 내서

되받아서 백성들의 갈채를 받았고

또한 수리사업이니 여러 가지 행정실적이 뛰어나서 지방관으로 탁월한 업적을 세웠다

 

당대의 정객이요 문단의 영수 구양수 문언박 등 원로들이

수차례 중앙정계진출을 권했으나

왕안석은 오래 오래 외직을 떠돌았다

 

1059년 마침내 사십세를 바라보는 왕안석이 서울 카이펑으로 왔다

당시 카이펑엔 포청천이 있었다

포청천은 당파나 신분 빈부를 가리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해서

한국의 텔레비전에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온 바 있다

 

여러 벼슬을 역임한 포청천이 삼사의 중책인 삼사사 시절에

탁지부 중견 관리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사마광과 왕안석이었다

두사람은 여공주 한유 두 사람 더해 넷이 어울려

밤새 카이펑 시내 아무개 펜션을 빌려 시문을 짓고

국사를 논하고 밤을 숱하게 새워서 세상에선 이들의 아름다운 우정을 기려

가우(嘉祐)사우(四友)라 칭했다

 

가우는 당시 황제였던 인종임금 시대 연호였다

 

한나라때 북방의 흉노에게 정책상 시집간 왕소군이 있다

왕소군을 명비라 한다

 

왕안석은 명비곡이란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당시 송나라 처지를 빗대었기도 하고

왕소군 개인의 파란만장한 삶은 잘 읊은 것이기도 하여

당시 문단의 매요신 구양수 등이 화답시를 지었고

사마광 또한 그러하였다

 

또한 사마광이 당백부 묘지명을 쓸 적에

사마광은 이를 왕안석에게 부탁하였다

 

부탁하면서 글을 남겼는데

그 내용인즉

나의 당백부 당백모는 매우 훌륭한 분이시다

이런 분들의 살아서 행적을 글로 짓기에는 당대에 대단한

인격과 품격을 지닌 사람이 마땅히 지어야 한다

 

이런 구절인데 바로 당사자로 지목된 사람이 왕안석이다

 

왕안석 또한 사마광의 식견과 문재를 극히 존숭하였다

 

두 인재의 우정은 가히 바위를 자를 만 했다

 

 

 

세월이 흘러 길었던 인종 짧았던 영종시대가 지나고

20대 신종 시대가 되었다

 

신종은 학문이 높고 도덕과 식견으로 여러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마광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다

그러나 사마광은 사사건건 도덕과 인의를 앞세워

여러 가지 사안에서 신종과 조금씩 어긋났고

튼실한 재정과 부국강병을 원하는 신종에게

 

백성을 아끼고 인본정치를 하여 덕으로 교화하면 천하는 안정된다는

쇄신안 같지 않은 쇄신안을 내놓았다

 

이때 적임자라 할 수 있는 장방평이 물러나고

사마광의 절친 왕안석이 신종에게 (양귀비가 현종에게 어필하듯이)

눈에 확 들어왔다

 

왕안석에 대한 평 중에 냉면무정(冷面無情)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능력과 문재는 출중하고

한 번 들으면 잊어 먹지 않는 총명함과 한 번

글을 지으면 고치지 않아도 그대로 출판사에 초고를 넘긴다는

정확성이 넘치고

 

또한 한 번 주장하면 물러서는 법이 없는 추진력 강한 사람이나

자비심이나 온정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신법이 시행되면서

그 엄격성과 이재를 추구하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 사마광은

낙양으로 낙향했고

여공주 또한 반대라인에 섰다

 

가우사우중 한사람인 한유(韓維)는 뜻을 같이하여

신법개혁 추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고집불통의 왕안석의 엄격함에 질려 사임하였으니

가우 사우는 몇 년 만에 뿔뿔이 흩어졌다

 

신법 개혁은 왕안석이 완전히 실각하여 남경으로 물러난 뒤에도

10여년 신법파들에 의해 추진되다가

신종 서거 이후 8년 세월 폐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이 신종 어머니 고씨 태황태후의 수렴첨정기간이다

 

이때 소식 소철 형제가 카이펑에서 때를 만나

그 유명한 황정견 등과 함께 시문을 논하고 나름

국사에 크게 참여했던 시기다

 

고씨 태후 서거후 성인이 된 철종은

아버지 신종의 뜻을 이어 다시 신법을 추진했고

북송의 신법당은 구법당을 가혹하게 눌러버렸다

 

1127년 금나라에 의해 카이펑이 점령되고

북송이 망하기 까지의 과정은 어느 왕조 흥망사가 그러하듯이

우여곡절이 장강의 물결처렴 길고 길었다

 

왜 북송이 망했는가

여기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밤을 새웠고

조선의 정조 임금은 그 자초지종을 반면교사로 삼고자

방대한 송사를 정리했다

 

먹고 살다가 시간의 틈이 혹 있다면

나 또한 그 시대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알아보고자 할

따름이다

 

카페 <젊어서 안했던 책읽기>에서

컵라면 바닥난 궁물을 아쉬워하며

비설 적노라


'글과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송 8  (0) 2019.01.03
1689년에  (0) 2019.01.02
북송 6  (0) 2018.12.31
북송 5  (0) 2018.12.30
북송 4  (0) 2018.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