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1689년에

guem56 2019. 1. 2. 18:02

1689년 봄이었다

숙종 임금의 춘추 설흔 무렵이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궁에서 쫓아내기로 했다

 

여러 선비들이 들고 일어났다

 

숙종 임금 재위 15년 기사년에 중궁(인현왕후)을 쫓아내기로 하니

판서 오두인과 참판 이세와 응교 박태보등 80여인이

부당함을 극간하는 상소를 올렸다

오공이 그 주동자로 되었는데 숙종이 진노하여

세 사람을 잡아다가 장을 때리고 멀리 유배 보냈다

 

숙종의 여동생 명안공주는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니 오두인은 매제의 부친이라

민간으로 치면 사돈댁 어른이었다

 

그 시대를 돌아보건데

각 정치세력간에 가짜뉴스가 엄청나게 양산되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성정이 불같은 숙종은 워낙 인현왕후 민씨에 대해

미운 감정이 극에 달한지라

역모에 가담한 역적 다루듯이 심한 형벌을 내렸다

 

당대의 대문장 농암 김창협은

오두인 공의 신도비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오두인 공은 의주로 가는 도중 파주에서 병들어 죽고

박태보 공은 남으로 가다가 한강 건너 노량진에서 죽었다

쌍백당 이세화 공만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6년이 지난 뒤

숙종은 이 일을 크게 후회하고

폐서인 된 민씨를 다시 왕후로 복위시켰으며

두 충신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관원을 보내 제사 지내고

오두인 공은 영의정에 박공은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충신문을 세우고 사당을 세우라 했다

 

(上之十五年己巳中宮遜位判書陽谷吳公斗寅與參判李公世華應敎朴公泰輔等八十餘人詣闕上書極諫吳公實爲首上震怒三人皆杖流遠地吳公至坡州朴公至露梁江皆道卒獨李公不死後六年甲戌上大悔前事旣迎還中宮正位坤極首念二公忠死特遣官致祭贈吳公爵議政府領議政謚忠貞朴公吏曹判書旌其閭曰忠臣之門有請立祠祀二公者)

그 옛날 매화리 살던 때

라디오에선 연일

....월남의 하늘아래 메아리치는 귀신 잡는 그 기백

총칼에 담고 ...

 

청룡부대 군가가 울리던 그때

매화학교에서 시조 한 수를 배웠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명재상 남구만 선생의 시조다

남구만의 손 위 누님이

박세당에게 출가했다

 

박세당 선생의 아들이 박태보다

 

남구만의 아들 남학명은 박태보와 동갑인데 생일은 빠르다

 

아들을 잃은 박세당이 조카 남학명에게 아들의 행장을 지으라 명했다

 

(태보의 부친은 판서 서계 박세당공이다 모친은 나의 큰 고모 의령 남씨부인이시다

태보는 1954년 생으로 나와 동갑인데 생월이 나보다 약간 늦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10년 같이 살다시피 했고

같이 놀고 같이 공부했다

잠자는 집이 달랐으나 출입기거를 무수히 같이 했다

 

이제 외백부님 명을 받들어 태보의 평생 행장을 지으려 하니 내 글로는 부족하나

눈물을 흘리며 적는다

태보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을 잘해서 열두살에 시를 읊고 화답할 줄 하니

세상 사람들이 놀랬다....)

 

.....父今判書西溪翁世堂母我伯姑贈貞夫人宜寧南氏以甲午五月降出後叔父諱世垕母卽坡平尹氏魯西先生諱宣擧女也君與我同年生而月日稍後我自孩提同居殆十年共游學相長大中雖分宅出入起居不與共者無幾今承溪翁之命記述君生平其可以不文辭遂抆涕而爲之叙曰君少而英銳異常文藝夙成自十一二歲爲詩應口而成發輒驚人

 

읽는 이들에게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남학명의

글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나의 할아버지 남일성 공(박태보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태보는

열두살 이었다 할아버지는 늘 집안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길

사람이란 어린이 벗어날 무렵에 그 평생을 알아볼 수 있다

저기 태보란 아이 내 외손주는 그 기백이 대단해서 지금

임금님 앞에 가도 별로 어려운 기색이 없을 것이라

오늘날 내가 판단해 보니 우리 할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我祖考下世日君年十二歲祖考嘗謂家人曰人於童丱時可决其平生如某者其氣魄雖在今至御前必無難色以今觀之可謂不負所期云

 

.........

 

박태보의 숙부 박세후 공은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태보는 입양되었다

숙모가 파평윤씨로 윤증(尹拯)선생의 손위 누님이시다

 

하여 윤증 또한 박태보의 외삼촌이 된다

윤증은 조카 박태보의 묘표(墓表)를 남긴다

 

새해 양력 둘째 날 갑자기

오두인 이세화 박태보 이런 사람들이 생각나서 적어보았다

 

카페 <마포나루>에서

강산채약인 적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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