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북송 11

guem56 2019. 1. 6. 18:47

음식천국이라는 사천성 청두(成都)

무후사와 두보초당이 있다

 

청두에서 한참 내려가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큰 부처상이 있는

러산(樂山)이 있다

 

그 중간 지점에 메이산(眉山)이 있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아미파의 본거지 아미산은 러산 서쪽에 있다

 

소순 소식 소철 3부자는 당송 팔대가에 한 집안이 자리했는데

시 문 론이나 경사집주등 글에선 대단한 문재를 자랑한다

 

왜 그리 시를 잘 지었는가?

후인들은 그 거처인 미산이 워낙 산수가 아름다워

그런 자연환경이 시를 잘 짓게 만든 요인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버지 소순은 젊어서 놀다가 부인 정씨를 맞이했는데

정씨는 글을 아는 사람이라 신랑을 은근히 공부하라

압력을 넣었다 하거니와 소순은 27

공부하기엔 늦은 나이에 분발하여 침식을 잊고 공부하였다

 

두 아들을 데리고 카이펑에 가서

당대의 대문장 구양수에게 인증을 얻었다

 

소순이 아들 소식이 보라고 지은 글 중에

이런 문구가 있다

 

言必中當世之過(언필중당세지과)

 

선비란 마땅히 입으로 도덕을 논하는거야 얼마든지 해야 하나

살고 있는 그 시대의 문제점이 있으면 이를 물고 늘어져야

선비란 뜻이다

 

이런 교훈을 내렸는데 아들 소동파는 평생

이 구절대로 살았다

 

왕안석이 신법 개혁을 추진하자 소식은

6천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신법 조목조목을 비판하였다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으나 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라

간관자리는 날아가고 멀리 항저우 부시장급으로 밀려났다

 

골치 아픈 소식을 내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왕안석은 낙향하고

사마광이 정권을 잡았다

 

눈치하나 기가 막히게 빠른 소식은 부지런히 말을 달려 카이펑으로 왔으니

소식 생각에 분면 사마온공(사마광)

모든 신법 조목조목을 다 뒤집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일이 커지기 전에 평소 돈독한 신뢰를 쌓아온 사마광을 설득하기

위해선 시간이 급했다

 

황소고집면에선 사마광과 왕안석은 서로 승패를 가리기 어려웠다

사마광은 모든 법령을 다 뒤집었다

 

소식은 신법의 여러 영역에서 폐지할 것도 많지만

이런 이런 점은 실제 백성들에게 유리하고 국익을 위해서

계속 살려 두어야 한다고 간곡하게 설득했으나

사마광은 마이동풍이었고

 

더해서 진노해서 소식을 내쳤다

 

이리하여

소식은 신법파 보수파 양진영에서 다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고

 

1093년 고씨 태황태후의 서거로 수렴첨정이 끝난 시점부터

노년에 엄청난 탄압을 받아

혜주를 거쳐 하이난(해남도)까지 유배를 간다

 

이런 과정에는 당시 재상이었던 장돈(章惇1035~1105)

개입이 있다

 

장돈은 젊어서 소식과 친구사이로 지냈다고도 하는데

명석하고 실무처리가 밝은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냉정하였다

이런 면이야 그렇다 하는데 유독 소동파를 못살게 굴었다

 

광동성 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소동파가

날씨 따듯하고 과일 풍성한 곳에서 좀 편안하게 지내는 듯

하니 귀양지를 하이난으로 옮겨 주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데다 가산이 거의 없는 소동파를 죽으라고

그리 보낸 것과 진배없다

오늘날 하이난은 젖과 꿀이 흐르고

돼지도 바나나를 먹으며 산다는 관광지이나

당시 하이난은 사람 살기 힘든 오지였고 열대성 질병이 창궐하는 곳이었다

 

당시 소동파가 하이난으로 가는 도중에

또는 하이난에 가서 지은 글들을 보면 머리칼이 솟거니와

이들 문장에 가장 절절히 감응한 분들이

바로 다산이요 추사였다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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