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

소순 변간론

guem56 2020. 6. 18. 09:41

<횡설수설>

 

올해 1월달은 그런대로 조용하니 새해 기분도

나고 살만했던 듯 하다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가 시작되고

유월 이렇게 더운데 625사변 터진지 70년인데

휴전선 근처가 냉랭하다

 

존 하지(John Reed Hodge)란 미국 군인이 있다

일본이 항복한 뒤 약 3년간 남한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미국 중장이다

 

힘이 약한 나라다 보니

점령국 미군 중장이 2천만쯤 되는 남한을 다스렸다

 

1882년 조선엔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형편없는 처우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민씨 일가를 척살했다

이 와중에 대원군이 잠시 권력을 잡았는데

 

청나라가 개입했다

30대 초반의 젊은이 위안스카이가 실제적으로 조선의 모든 문제에 관여했다

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붙잡혀 서해바다를 건너 텐진으로 끌려갔다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나

김옥균이 삼일천하도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갑신정변이후 10여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사람들은 이를 갑오전쟁이라 하는데

청군은 서해 평안도 앞바다 해전에서

그리고 평양전투에서 다 패했다

 

위안스카이는 10년 동안 조선 정계를 주무르다 물러났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일본은 신흥강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은 여러 가지 불평등 조약으로 깊은 수렁에 빠졌으며

조선은 일본의 야욕에 무기력과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그나마 힘이 있었던 러시아에 기대고자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중국으로 간 위안스카이는 원로 대신 리홍장의 뒤를 이어

중국 군권을 장악하고 청나라 내정에 깊이 개입했다

 

말기 청나라를 말아먹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태후

 

서태후를 몰아내려 했던 개혁파의 시도는

양다리를 걸치고 눈치를 보던 위안스카이가 서태후 편에 서는 바람에

실패했다

 

양계초는 일본으로 도망했다

 

양계초는 북송시대 왕안석의 신법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왕안석을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가라 했고

그의 개혁이 실패한 것을 아쉬워했다

 

같은 사실에 대해 해석은 너무나 다르다

 

금나라에 의해 북송이 망하고

남송의 초대 황제가 된 고종은

왕안석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가 요상한 신법을 들고 나와 북송을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왕안석 생전에

왕안석이 신법을 시행하려던 그 무렵

왕안석을 콕 집어 간신이라고 지목한 글이 있었으니

소순의 변간론이다

 

변간론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惟天下之靜者(유천하지정자)

乃能見微而知著(내능견미이지저)

 

가만히 조용함을 지키는 현명한 사람은

능히 미세한 것을 보고 어떻게 드러낼지 내다볼 수 있다

 

月暈而風(월훈이풍)

礎潤而雨(초윤이우)

 

바람이 세게 불라치면 달무리가 미리 일고

비가 올라치면 주춧돌이 먼저 젖는 이치이니

 

人人知之(인인지지)

今有人(금유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

지금 어떤 사람이 있어

 

口誦孔老之言(구송공노지언)

身履夷齊之行(신리이제지행)

收召好名之士不得志之人(수소호명지사불득지지인)

 

입으로는 공자 노자의 말을 읊조리며

몸으로는 백이 숙제를 따라하는 듯 하며

명예를 좋아하거나 아직 뜻을 펼쳐보지 못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바로 여기서 말하는 표리가 부동한 사람이

왕안석을 지칭한다

 

이 변간론(辨姦論)은 후세에 위작이라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문체의 특성이며 시대 배경으로 보아 소순의 글이라는 설이 대세이다

 

소순은 소동파의 부친이다

 

왕안석은 평소

세수를 잘 안하고 의복이 정결하지 못했다 한다

변간론에도 이런 사실이 적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소순은 왕안석의 인간성 자체를 나쁘게 생각했다

 

아무튼 왕안석의 신법개혁은 11세기 후반 북송 정계를 뒤흔들었고

그 공과에 대한 해석은 천년을 두고 지금까지 이어온다

 

간간이 왕안석 개혁에 관한

신문기사나 여러 인용글을 보고

나 스스로 왕안석은 어떤 인물이며

 

그가 추진한 개혁은 실패를 원래 잉태한 허술한 구조였는가

아니면 개혁을 거부하는 수구세력의 방해로 열매를 맺지 못한

안타까운 일이었었나

 

서너번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오늘 그래도 가부간 의견을 내라면 나는 왕안석을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으나

제대로 된 개혁가라 여기진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는 사람을 쓰는데 실패했다

모든 일은 나혼자 할 수 없고 따라서

유능한 팀원들을 확보해야 한다

 

그는 사람을 잘 못 골랐다

거기다 우군이 될 만한 과거의 지인들을 거의 내쫓았다

 

예나 지금이나

시스템이나 법률 그런거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그리고 사람은 그럴듯한 사람은

그럴듯한 말로 포장을 잘 한다

 

인권을 외치는 자가

집안 사람들은 가혹하게 대하는 경우도 많다

 

돈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중히 여긴다고 늘 주장하는

사람중 그렇지 않은 이도 많다

 

지난 세월

나는 간간이

태평천국의 난을 수습한

증국번이 떠난 이래

 

이홍장과 원세개

그리고 강유위와 양계초 등등의 문집을

먼산 바라보기로 간간이 살펴 본 적이 있다

 

양계초는 대학자로 이름이 높지만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그의 평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심혈을 기울여 쓴

이홍장 전기는 읽어볼만 하다

 

서세동점의 아픈 역사가 잘 그려져 있다

 

그리고 덧붙일 점은 양계초는 망국의 한을 품고

중국으로 간 구한말의 한국인 학자들을 나름

열심히 도왔다

큰 은혜를 한국인들에게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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