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蘇東坡)

소동파 한식첩

guem56 2021. 3. 9. 14:42

추사선생의 세한도를 손창근옹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세한도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갔다가 서울로 와서

머물다 일본으로 갔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일본 땅이 미군기의 공습에 직면한 시절

세한도는 후지즈카 치카시 일본학자가 손재형에게 아무 댓가없이 돌려주었다

 

중국 사람들이 서묵명품으로 꼽는 행서가 셋이니

천하제일품이 그 유명한 왕희지의 난정서

둘째가 당나라 안진경의 제질문고

 

세 번째가 소동파의 한식첩이다

 

10여년전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 패키지 여행으로 구경을 갔는데

사람은 인산인해 그 와중에 두 시간 구경 시간이 주어졌다

 

주위가 산만하기론 9단 급인 아들 준이를 살피면서

(한눈 팔다가 사람 잊어먹는 상황이라)

여기 저기 전시실을 돌아다니느라

고생이 심했는데

 

아래층 전시관 상품점에서 소동파의 한식첩 복사본을 두루마리 축으로 만들어

팔고 있는 듯 했다

가격이 어지간히 비싼 듯 하여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와버렸다

 

북송시대

송나라가 북쪽 거란과 서쪽 서하에 엄청난 금액의 세폐를 제공하며서

평화가 유지되던 시절

새로 등극한 젊은 황제 신종은 개혁을 주장하는 왕안석과 죽이 맞아

전광석화로 변법 개혁을 추진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늦게 만난 것이 한이었다

 

개혁은 과격해서 정계와 문단의 영수 구양수가 돌아섰고

왕안석과 콩 한쪽도 나눠먹던 절친 사마광은 왕안석과 절교에 이르고

자치통감 편찬하는 일로 정계를 떠났다

 

소동파 또한 지방관으로 갔으나 개혁당에 밉상으로 보여

오대시안이란 필화사건을 겪었다

 

일설에 의하면

신종의 어머니 고태후가 뿔이 단단히 난 신종을 뜯어 말려서

소동파는

죽음을 면하고 황저우에 단련부사라는 이름뿐인 벼슬로 유배되었다

 

황주에서 세 번의 봄을 맞으며 한식날 읊은 시를 적은 것이 한식첩이다

 

2년뒤 소동파가 여주로 가라는 전근명령을 받았을 때

바쁜 와중에 한식첩을 챙기지 못했고

한식첩은 지역 주민 손에 들어갔다

 

하남 현령이었던 장호가 1085년 쓰촨 고향 가던 길에 황주를 지나면서

평소 흠모하던 소동파의 적거지를 지나던 중 소동파의 필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

비싼 돈을 주고 한식첩을 구입했다

 

장호의 부친 장공유와 원로 정객

이공택은 친우였는데 이공택의 처가쪽 조카가 황정견이고

황정견은 장호와 어릴 적부터 교우가 있었다

 

1100

소동파가 죽기 1년전 하이난 섬의 단저우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시절

 

스승의 당으로 몰려 황정견 또한 쓰촨 지방 양자강 유역을 유배에 유배를 거듭하면서

시서화에 젖어 살던 시절

친구 장호를 만났고 여기서 천만의외 몽매에 그리던 스승 소동파의 진적을 만났다

스승의 생사여부도 모르던 시절 황산곡은 감격하여

발문을 달았다...

 

이 글씨는 이태백의 경지를 넘어섰고 아마 소동파가 다시 쓴다 해도 이처럼

펼쳐 내지는 못하리라...이런 극찬의 감상문을 달았다

 

한식첩은 남송 시대 문인 홍매가 소장했고

원나라 때에는 원나라 문종이 애지중지하여 천력지보라는 찬사를 남겼다

 

명나라 말기 명소장가 한세능에게 갔고

한세능이 동기창에게 보여서 현재 한식첩엔 또한 동기창의 짧은 감상문이 달려있다

 

청조에 들어와 건륭제가 한식첩을 귀하게 여겨 역시 발을 달았다

 

한식첩은 세 번의 화재를 겪었다

1860년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영국 연합군이 북경에 처들어가 원명원을 불태운걸

크게 비난했다

 

원명원 화재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 되던 와중에 한식첩은 살아남아 민간에 흘러갔다

 

서안이 있는 섬서성에 풍전운이란 관리가 한식첩을 손에 넣었다

금전적인 문제로 한식첩을 전당포에 맡겼는데

불이 났다

지금도 한식첩 말미에 당시의 화재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한식첩은 만주족 출신 완안경현 손에 들어가고

완안씨는 1917년 중산공원에서 소동파 전시회를 연다

이리하여 소동파의 한식첩이 일반 시민에게 공개된다

 

안운백이란 사람이 완안씨 후손에게 한식첩을 구입하고

안운백은 일본에 가서 한식첩을 전시한다

 

소동파의 작품에 푹 빠진 일본인 기쿠치(菊池惺堂)가 이를 사들인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한다

무고한 조선인이 무수하게 학살된 그 지진이다

불덩어리가 치솟는 와중에 기쿠치는 죽음을 무릅쓰고

한식첩과 이공린의 소상도(瀟湘圖)를 구해냈다는 설이 전한다

 

국보가 외국에 흘러간 것을 안타까와 하던 장대천등의 노력으로

한식첩은 계속 중국사람들의 주목하에 있었다

1950년 중국 본토는 공산당에게 넘어갔으나

타이완으로 온 과거 우한학교 교장 왕세걸이 일본으로 건너가

거금을 들여 기쿠치의 후손한테 한식첩을 구입

타이완으로 들여오는데 성공했다

 

195012월 이땅에선 남북의 살육전이 한창인 때였다

 

한식첩은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현재 잘 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세한도 그리고 한식첩등을 억지로라도 흉내내어

벽에 걸어놓고 혼자 쳐다보고자 한다

 

그럴려면 밥을 잘 챙겨 먹어야 하는데

나는 라면에 중독이 되었으니 이를 어이하나.......

 

신축년 춘삼월 비설 적노라~~

 

 

'소동파(蘇東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송 10  (0) 2019.01.05
완계사(속속의건)  (0) 2015.12.21
망강남(望江南)  (0) 2015.12.18
심원춘  (0) 2015.12.08
야박우구(夜泊牛口)  (0) 2014.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