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九雲夢)

로렐라이<Cent trois 103>

guem56 2011. 7. 12. 22:02

로레라이 언덕아래

푸른 강

정말로 인어가 산다고 나는 믿었다

 

어느날

거대한 방적기계들 숲에서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일이 끝이 없어

 

노동에 지친 사람들이

쉬고 싶다는 노래를 부를 때

나는 낭만은 책속에 있음을 알았다

 

설악산

공룡능선이 운무에 숨은

위험한 양쪽 다 낭떠러지 솟은 회랑에서

발을 어느 쪽으로 잘못 디뎌도

소리도 없이 떨어져

도솔천으로 간다고 했을 적에

 

내 배낭에 들은

습기 먹은 독일어 사전을 한나절 헤매고 나서

살려 왔을때

학문 또한 덧없음을 알았다

 

하이네의

로렐라이 언덕도 먹고 사는

빵의 문제를 덮지 못했다

 

생의 한가운데

스멀거리는 청춘의 배고픔은

유신시대의 안개속에 있었다

 

똑똑한 사람들은 감옥에 줄을 섰고

보다 집안이 어려운 사람은

사법고시 독서실에 입주했다

 

나는 하릴없이

풀이 무성히 자란

왜정때 만들었다는

어느 터널 밑

한켠에 자리잡은 비가 새는 선술집에서

밀로 만든 막걸리를 마셨다

 

어렸을 때 영원한 대통령으로 알았던

사람이 총성에 세상을 등졌을때

나또한 사랑도 명예도

조국도 민주화도 접고

길이 길이 낮잠에 취해서

강산이 변했다

 

보초

신새벽에 일어나 목마름과 배고픔을 달래주던

그 건빵의 맛을 여전히 기억한다

 

남은 것은 이제 희미하다

나는 세상의 신산에 시들기 보다는

낮잠에 머리가 멍해지고

잔술에 닳은 내 위장을 걱정해야 한다

 

보다 충실히 살았던 벗들은

나의 밋밋했던 삶을 비웃는다

 

가고 싶었던 로렐라이 언덕을

푼돈을 모아 나는 갈 수가 있으나

내일 아침에라도 거기에 간들

내 기억의 로렐라이는 아마 아닐 것이다

 

생이 시들하다고 마감하긴 어렵고

남은 대로 이제 살아야 할 뿐이다

 

안개처럼 짙은 허무가 나를 감싸고

긴 여름 새벽 빗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흐를 때

오래 살아남은 내가 나를 기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