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유성호접검

guem56 2010. 3. 26. 16:44

 기억력이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어

세월보다 먼저 바랜다

 

그러나 더러

잊혀진듯 한데 오래 오래 쇠심줄처럼 질기게

머리에 저장되어 삭제를 모르는 과거가 가끔씩 살아있다

 

어느 해 봄

지금은 사라진 언덕위의 극장(그때는 영화관을 극장이라 불렀다)에

들어갔다

 

칼과 포승줄이 어지러이 춤을 추고

겹겹이 띠를 두른 살수(殺手)들이 현란한

진법을 구사하며 우열의 자리를 번갈아 점했다

 

고독한 살수 맹성혼

난공불락의 용문방 최고수 손방주를

제거하라는 명을 받았다

 

떠나는 길에 소접을 만나고

인연을 느꼈다

 

강호에 몸을 묻고

삿갓에 얼굴을 가린 절대 고수 한당이

믿었던 사람에게 한칼에 무너지고

 

영화는 끝없는 음모로 빠져들었다

사랑에 좌절하여 술에 절은 섭상이 장렬하게 떠나고

 

손방주는 율향천에게 등을 보여

일곱군데 점혈을 찍히며 저승길에 발을 디디나 하는 순간

 

지하 암도를 타고

숨막히는 삶의 혈로를 뚫는다

 

잔혹과 냉정함

치밀한 음모로 무림의 지존을 노렸으나

율향천은 인과응보의 률을 어기지는 못하고

 

꽃이 화사한 화원에서

맹성혼은 손방주와 작별을 한다

 

안나푸르나 그 히말라야를 다녀온 사람이 말한다

다시 또 가고 싶고

꼭 가봐야 할 곳이었다고

 

검은 하늘에 별빛은 흐르고

호접은 사뿐이 날아든다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잠시

강호의 의리

너무나 추상적이고

그만큼 라면 물이 끓는 어느 만화방에 손 때 묻은 만화 같을 수도 있는

그런 심심풀이나 유치함일 수도 있으나

 

나는 그 유성호접검의 여운에 강산이

변한 세월

 

여전히 히말라야의 웅장함이 다녀온 이의 가슴에 깊이 박히듯이

그렇게 유성과 호접이 맴돈다

 

곤계란을 팔던 그 영화관 골목에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고개 마루로 오르던 어느 저녁

온 몸이 부르르 영화의 감동에 절어 나오던 그때는 옛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