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九雲夢)

옌안 가는 길

guem56 2013. 4. 24. 17:16

그해 여름은 더웠고

가을엔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12월에 시내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다

 

봄과 여름 내내

누구나 20점 다 맞는 체력장을 거의 매일 하다 보니

학교 다니는게 몸도 마음도 힘들었는데

 

9월 어느날 체력장 시험이 끝나고

영화 빠삐용을 165원을 내고 본 날 뒤로는 체육은 수업에서 사라져서

한결 살림살이가 나아졌으나 어둠이 밀려오는 7시쯤

11월의 쌀쌀한 저녁 온기없는 도시락을 먹으며

아이들은 양계장의 닭들처럼 수학문제를 쪼아댔다

 

 

도덕과목은 200점 만점중 10점이었는데

도덕책엔 통일전략전술이란 낯선 용어가 등장했다

 

공산당은 힘이 약할 때 회담을 제의하고 협력을 하다가 힘이 강해지면

상대를 쓰러뜨리고 공산혁명을 완수한다는 그런 이론이었다

 

내용이 그리 쉽지는 않아서

체력장처럼 거의 모든 학생이 10점을 맞을 뻔 하다가

 

공산당 이론이 나오면 한두개 틀리게 되어 통일전략전술은 잘 알아두어야 했다

 

도덕선생님의 함자는 잊었다

 

그 선생님은 수업이나 나올 만한 문제를 프린트로 찝어 주시기 보다는

두가지 이야기로 시간을 채우셨는데 강론의 뼈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서양철학은 두 개의 기둥이 있다

하나는 헤브라이즘이고 하나는 헬레니즘이다

 

어리고 무식한 우리가 전혀 못알아듣는 희안한 발음의 두 개의 기둥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나오면 선생님은 허기사 느덜이 이걸 알랴 하고는 한참 써놓으신 글씨를 지우셨다

 

 

둘째, 연안장정이다...

모택동이 장개석군대에게 쫓겨서 2만리 눈길을 도망갔다는 그 이야기를 선생님은 매일 반복하셨다.

그리고 말미에 장개석이 당했다. 이게 통일전략전술이다

 

 

선생님의 반복된 말씀을 들어보면 장개석이 당해서 원통하시다는건지

고생 끝에 중국을 몽땅 털어먹은 모택동이 잘했다는 건지 그건 알수 없었다

 

 

다만, 서안에서 장개석이 국공합작을 바라는 세력에 의해 연금이 되어

그때 모택동을 완전히 누르질 못해서 나중에 거꾸로 대만으로 쫓겨갔다는

그런 이야기도 꼭 덧붙이신 걸 보면

누구 편도 아니고 무상한 인생을 말씀하는지도 몰랐다

 

 

주요 과목도 아니고

아이들은 입시에 떨어지면 다리몽둥이가 부러지기에 그저 흘려들었고

 

그 선생님은 담임반도 없고 아마 임시로 가르치시는

21세기로 말하면 기간제 교사 같은 분이라

 

언젠가 그 선생님이 대학을 다니시거나

유신시대의 그늘에서 혼자 읽으신 불온한 책 내용을 수업시간에 흘리면서 추운 겨울을 보내셨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옌안(연안)은 자리잡았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서울에 중국 탁구선수들이 다녀가고

한국사람들은 장가계나 구채구로 중국 풍경을 보러 다녔다

 

 

샨시성 시안 가는 길은

누런 먼지가 하늘과 땅에 가득해서 시야가 흐렸다

 

공항에서 서안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강물이 보였고

여기가 제갈량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는 오장원이 멀지 않고

또한 강태공이 낚시했다는 위수는 더 가까이 있다고 느꼈을 때

 

큼직한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고 거기엔

연안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낯선 땅에서 뜬금없이

중학교 도덕 시간으로 시간 여행을 했다

 

 

1930년대 연안장정에 한국 사람이 얼마나 참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해방이 되기 전에

천태산인 김태준은

경성트로이카 멤버인 박진홍과 함께 걸어서

연안에 갔다는 기록이 있고 그 여정은 <연안행>으로 남았다

 

 

박진홍의 친구였던 이효정은 2010년 인천에서 별세했다

이효정은 어느해 삼일절 무렵

당시 대통령 노무현에게서

원로 독립운동가를 대우하는 성격의 위로전화를 받았다

 

전화 한통이

이제 바깥출입을 잃어버린 망백세를 바라보는 노인에게

평생 가장 큰 선물이 되었노라고

그렇게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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